나는 아쉬움을 사랑한다
이 웅 재
살다 보면 누구나 아쉬웠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때였던가? 100m 달리기 경주가 있었다. 5명이 뛰었다. 1,2등은 언감생심, 3등도 내게는 도저히 탐낼 수 없는 자리였다. 한참을 뛰다 보니 4등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게 웬 일인가? 용기를 내었다. 내 뒤로 1명이 더 있는 것이다. 헉헉! 시간이 갈수록 숨이 차 오고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그러나 전력질주, 정말이지 ‘죽어라’ 하고 달렸다. 결승전에 도착한 나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 한 번 쓰러져 버렸다. 내 등수는 5등, 바로 ‘꼴등’이었다. 처음부터 걸어갔어도 되는 등수였던 것이다. 정말로 아쉬웠던 순간이었다.
아쉬운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아쉬운 일은 어느 때라도 찾아올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남들이 볼 때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인 경우가 허다하다. 언제였던가? 가난했던 시절에서 마악 벗어날 즈음이었을 것이다. 어떤 연유에서였던지 처음으로 뷔페에 간 적이 있었다. ‘산해진미’라는 말도 경험적으로 느껴보질 못했었는데, 사전에는 ‘녹설(鹿舌)’이라는 말도 있음을 그때에야 알게 되었다. 그런 음식을 무제한으로 가져다 먹을 수가 있다니? ‘대한민국’의 국민인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은 잊혀지질 않는다. 물론 그 기억의 끝자락에는 심한 배탈로 해서 고생했던 장면이 클로즈업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먹는 것 가지고 ‘아쉬움’과 같은 고귀한 감정을 설명하는 일이 조금은 쑥스럽기도 하지만, ‘필요할 때 모자라거나 없어서 안타깝고 만족스럽지 못하게 여기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생각해 보면, 나는 매일같이 그 아쉬움을 실감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 저녁만 해도 그렇다.
술을 좋아하는 나는 매일 저녁 술을 마신다. 직접 담근 매실주 등을 저녁 식사 후 내 방에 혼자 들어와 TV 연속극을 보면서 머그컵 한 잔 정도씩 늘 마신다. 술 마실 때처럼 연속극이 재미있을 때는 없다. 그 통속적인 재미는 술 마실 때라야만 제맛이 난다.
술은 ‘등하독작(燈下獨酌)’이다. 물론 이태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의 ‘덩달이’다. ‘월하독작’의 경우에는 달빛이 안주였겠지만, ‘등하독작’에서는 그래도 안주가 너댓 가지나 된다. 그 안주들이 하나씩 동이 날 때의 ‘아쉬움’이 나를 매일같이 ‘등하독작’을 하게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의 아름다움’ 말이다. 오늘의 경우를 보자.
먼저, 통북어포, 술안주로 통북어포를 뜯어먹는 사람은 별로 본 적이 없다. 지난 추석 때, 성묘를 하면서 휴대용 제사상에 놓았던 물건이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그것으로 반찬을 만들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놈을 안주 제1호로 삼았다. 맛이 좋았다. 그냥 잘게 뜯어서 만든 북어포와는 달랐다. 잘 뜯겨지지 않는 껍질을 벗겨내고, 뼈와 지느러미 따위를 뜯어내는 일 따위가 그냥 단순하게 집어먹는 안주와는 다르기도 해서 더욱 그 맛에 푹 빠질 수가 있었다.
다음은 사과. 금년엔 과일이 풍년이었다. 특히 연시나 단감 같은 것은 엄청 싸서 한 동안 안줏감에서 빠지지를 않았다. 감의 그 떫은맛에 들어있는 탄닌 성분,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하여 고혈압이나 동맥경화에 좋을 뿐만 아니라 알코올의 분해를 도와주는 효과도 있다고 하니, 저절시구, 하지만 너무 먹었더니 그만 변(便)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 것이 아닌가? 과유불급, 그래서 당분간은 조금 멀리하기로 하고 사과로 대치했다. 금년엔 사과도 대풍이었다. 인류의 탄생 때부터 함께 있었던 사과, 이브가 아담을 몰락시키는 데 유용하게 이용되었던 사과, 요사이에 와서는 ‘한 입 베어먹은 사과’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을 정도가 되지 않았는가? 컴퓨터 얘기다. 그러한 사과는 사다가 며칠 놓아두면 사람이 늙는 것처럼 주름이 생긴다. 그 주름진 사과를 깎아서 술안주로 먹는 일은 ‘내 늙음을 먹어치우는 것’ 같기도 해서 그 맛이 또한 별미였다.
그리고 ‘가문어’. 사실 그것을 사다 먹으면서도 늘 문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봉지 겉면에 ‘가문어’라고 쓰여 있는 걸 보고,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보았더니 ‘가문어’의 ‘가’는 한자로 ‘假’, 곧 가짜문어, 깊은 바다에서 사는 ‘대왕오징어’였다. 문어는 다리가 8개로 ‘8완목과(八腕目科)’에 속하는 놈으로 낙지와 주꾸미가 같은 ‘목(目)’에 속한다. 그런데 오징어는 다리가 10개인 ‘10완목과’로 한치(창오징어), 꼴두기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놈이다. 10완목과이면서도 8완목과로 행세하는 놈이 바로 이 ‘가문어’인데, 먹다 보면 ‘假’ 자는 떼어주고픈 생각이 들 정도로 문어와 맛이 어금지금하는 놈이다. 고놈도 이제 바닥이 나려 하고 있다. 내가 마구 먹어버린다고 나를 증오하는 놈, ‘오증어(吾憎魚)’와도 이제는 이별을 하는 수밖에는 없게 되었다.
다음은 고소한 맛의 땅콩. 놈은 보통 ‘심심풀이’로 치부된다. 요놈도 고혈압과 고지혈증에 좋음은 물론이요, 두뇌 발달과 치매 예방의 효과도 있다고 하니, 어찌 ‘심심풀이’로만 그칠 수 있을 것이랴? 그래서일까? 땅콩이 달랑달랑해지면, 갑자기 모든 생각이 정지되어 버린다. 두뇌 기능이 파업을 하는 것이다. 내가 땅콩에 꼼짝 못하는 이유, 알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제일 아쉬운 건 술이다. 술이 달랑달랑해지면, 시간도 어지간히 되었다는 증거, 눈꺼풀이 먼저 신호를 보내온다. 아쉽다. 하지만, 머그컵으로 한 잔, 그 이상은 삼가는 것이 좋다. 절주(節酒), 혼자 마시는 술일수록 필요한 덕목이다. 아쉬움으로 끝내자. 아쉬운 것이 많다는 것은, 모자라는 것이 많다는 것, 모자라는 것은 채울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늘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다.
(17.12.21.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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