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즐겁다
이 웅 재
나는 보통 아침 8시에 일어난다. 야간형 인간인 때문이다. 늦게 일어나서 그런지 ‘5분만 더, 3분만 더…’ 하면서, 좀더 잤으면 하는 아쉬워하는 마음 같은 것은 가지질 않는다. 아주 느긋한 심정으로 베란다에 나가서 하늘을 한 번 쳐다본 다음 천천히 하루를 시작한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하루 종일 할 일이 별로 없다. 할 일이 별로 없으니, 시간이 느릿느릿 지나간다. 그런데 흔히들 세월이 빠르다고들 한다. 실제로 보내는 시간은 느릿느릿 지나가지만, 한 일이 없다 보니 훌쩍 지나가 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이것저것 바쁘게 지내는 날은 여러 가지 일들이 머릿속에 남는 까닭으로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간 것으로 느껴질 수가 있겠다. 세월은 시간이 모인 개념이다. 할 일이 없는 노인들에게는 하루하루의 시간들이 밋밋하게 여겨지고, 그래서 그 시간들이 모여진 해[歲]나 달[月]은 내세울 것이 없는 시간의 집합체가 되어 빨리 지나간 것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정년퇴직을 하면서, 세월이 빠르다고 인식되지 않게끔 만들기 위한 몇 가지의 꼼수를 마련하였다. 그 첫째가 신문과의 대면이다. 사람들은 보통 신문을 ‘본다’라든가 ‘읽는다’라고들 하는데, 나는 신문을 ‘입력한다’. 중요한 제목들을 컴퓨터 일기에 입력하는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도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언제 무슨 일이 있었지 하는 것을 찾아보는 데에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한 가지 단점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점이겠는데, 사실은 그걸 노리고 하는 행동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
아침 식사는 빨라야 10시 정도, 아니면 아예 ‘아점’으로 해결한다. 그리고 나서 신문 제목을 입력하다 보면 두세 시쯤은 되어야 일이 끝나는데, 중간에 약간 지루하다 싶은 생각이 들면, 컴퓨터 게임으로 옮겨간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무슨 ‘스타크래프트’ 같은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유행했던 DX Ball, 벽돌깨기다. 늙은이들에게는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순발력도 기를 수가 있어 아주 좋은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절대로 다른 게임으로 바꿀 생각은 없다. 중간에 실패하지 않고 게임을 마치려면 보통 1시간 반 내지 2시간이 걸린다. 그러면 오후 4시나 5시쯤이 된다.
그 다음에는 탄천 산책을 한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여수대교까지 1시간 정도를 걷는다. 산책은 즐겁다. 건강을 위해서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일인데다가 다른 운동처럼 돈이 들지도 않아 부담도 없다. 가다가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사소한 일들은 마음을 아주 여유롭게 만들어준다. 새봄이 찾아왔다고 보라색 꽃을 아기자기하게 피워내는 개불알풀도 반갑고, 바톤을 받아 꽃대를 올리는 꽃다지도 귀엽다. 계절에 따라서는 먹을 수는 없지만, 가끔 입맛을 다시게 만들어주는 핫도그도 만난다. 부들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잉어, 청둥오리는 너무 많아 관심 밖이지만, 물이 얕은 곳의 자그마한 바위 위에는 어쩌다 햇볕쬐기를 하는 자라도 만나볼 수가 있고, 둔치 위쪽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종묘장 옆길에서는 꿩하고 마주치기도 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면서 휴대폰으로 사진이라도 찍을라치면 놈은 어느새 모델이라도 된 듯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주기도 한다. 어정거리는 왜가리나 해오라기도 눈길을 끌게 만든다. 할 일 없이 어슬렁대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 잽싸게 피라미 따위를 낚아채는 모습을 보면 ‘기다림’의 미학을 배울 수도 있어서 가슴 뿌듯하다. 반려견 놀이장에도 심심찮게 눈길을 준다. 여수대교 지나서 모란으로 나가는 곳 둔치 위쪽의 둑 위 공지에는 한때 양귀비꽃도 만발했었다.
징검다리도 운치를 더해준다. 그런데 그곳에 세워져 있는 팻말이 눈에 거슬린 적이 있었다. ‘징검여울 건널 때의 주의사항’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징검다리’라고 바루어주어야겠다고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이심전심이었는지 어느 날 보니 제대로 바루어져 있어서 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산책이 끝나고 돌아와서 먹는 저녁밥은 꿀맛이다. 늙으면 식사량도 줄어들고 밥맛도 별로라고들 하지만, 그럴 염려 없어서 더욱 좋다. 저녁 식사 이후에는 그야말로 널널한 시간을 즐겁게 보낸다. 내 방으로 들어와서 자그마한 TV를 틀어놓고는 볼 만한 프로를 찾아 재미있게 시청을 하면서, 달빛이 내 방까지 들어오지는 않지만 이태백을 본따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즐겨본다. 때로는 백거이(白居易)의 「취음선생전(醉吟先生傳)」을 읽기도 한다.
“내가 천지간에 태어나서 능력도 행실도 옛 사람에게 도저히 미치지 못하지만, 저 검루(黔婁)보다도 풍족하고, 안회(顔回)보다도 오래 살았으며, 백이(伯夷)보다도 배불리 먹었으며, 영계기(榮啓期)보다도 즐거이 지냈고, 위숙보(衛叔寶)보다도 건강했으니, 다행스럽기 그지없고 그지없었도다! 내 어찌 무엇을 바라리오!”
그러면서 그의 권주 14수(勸酒 14首)를 찾아 읊는다. ‘하처난망주(何處難忘酒: 어느 곳에서나 술 잊긴 어려워)리오, 불여내음주(不如來飮酒: 이리 와 술 마심만 못하네)라네.’
그러다 보면 비몽사몽간에 호화저택의 룸바에서 일잔을 하고 있는 나를 만나기도 한다. 평소에는 보지 못하던 아름다운 꽃이 사방에 피어 있어, 꽃을 좋아하는 나는 주인장의 허락을 얻어 포기나누기 등을 하여 집에 가져다 심기도 한다.
하루는 24시간, 그 중의 1/3은 잠자는 시간이다. 최대의 즐거움은 그 시간에 찾아오는 것이다. 나는 평소에 ‘오늘 밤에는 즐거운 꿈을 꿀 것이다.’ 하는 ‘자기암시’ 혹은 ‘자기최면’을 즐긴다. 그러면 여축없이 천당까지는 몰라도 99당까지는 가 볼 수가 있어, 더 없이 행복하다. 천당을 지키는 문지기라도 만날라치면, 우리집이 있는 ‘분당’인 줄 알고 잘못 찾아왔으니,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는 말로 얼버무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내게는 ‘하루하루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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