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깨기 컴퓨터 게임아
이 웅 재
Dx Ball이 한창 클라이막스에 달했는데 느닷없이 HP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흘낏 쳐다보니 아내 전화다. 다른 사람 전화 같으면 Dx Ball에서 쉴 수 있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받으려 했을 것이다. 끊어지면 내가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주면 될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전화를 건 당사자가 누군가? 바로 마나님인 것이다. 더군다나 방금 현관문을 열고 외출한 처지이다. 그렇다면 HP이든가 지하철 카드라든가 무언가를 잊고 나갔다는 얘기다. 생각해 보니 HP은 아님이 틀림없다. 지금 전화를 걸고 있지 않은가? 어쨌든 할 수 없다. Life 하나를 죽이더라도 받아야만 한다. 아깝다. 아깝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 누구나 살아가노라면 할 수 없이 행해야만 하는 일들이 가끔씩은 있지 않은가? 바로 지금이 그러한 때다. HP을 집어든다.
“왜?”
“마스크를 잊고 나왔어….”
“응, 알았어.”
그놈의 ‘코로나19’가 속을 썩이는 거다. 부리나케 마스크를 찾아 가지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내도 마악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다. 건네주는 마스크를 받으며 아내가 한 마디 한다.
“나, 바보 아니야?”
늘 가지고 나가던 마스크를 잊고 나갔다는 얘기이다. 비슷한 일이 있을 때면 흔히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은 ‘요새는 왜 이렇게 깜빡깜빡하는 거지?’의 대용품이다. 이젠 늙었다는 하소연이기도 하다. 변형도 있다. ‘아이, 푼수야….’물론 그건 혼잣말이다. 좌우간, 이런 표현을 사용할 때에는 그냥 묵묵부답으로 지내는 것이 상수다.
“갔다 올게.”
아내가 말한다. 그건 미안하다는 말의 대용물일 게다.
“잘 갔다 와.”
모처럼 미안하다고 하는데 모른 체해서는 안 되겠기에 나도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넨다. 그리곤 내 방으로 들어와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여유 Life도 죽여 놓고 전화를 받았던 상태인데, 마지막 Ball이 아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다. 숨 쉴 사이도 없이 Ball을 받아 이리저리 벽돌을 깬다. 순발력 발휘, 이런 게 Dx Ball의 장점의 하나이다. 나이가 들면서 무디어져 가는 어떤 사태에 대한 반응력, 그걸 조금이나마 줄여주는 역할을 이 벽돌깨기가 담당해 준다.
숨 막힐 정도의 절체절명의 순간이 계속 이어진다. 이러다간 십상팔구(十常八九) Life 하나가 또 죽게 된다. 컴퓨터 자판 위의 양손 손가락들이 쉴 틈 없이 움직인다. 이것도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은 운동의 하나가 된다.
그런데, 순간, 이게 웬 구세주냐? ‘Slow Ball’ 하나가 뜬다. 속도를 느리게 해 주는 Ball이다. 어랍쇼? ‘어렵쇼’가 표준말이지만, 이 경우에는 ‘어랍쇼’가 제격이다. 모음조화를 깨뜨려서 보다 강조된 느낌을 주는 표현이니까 말이다. 속도를 느리게 해 주는 Ball에 이어 이번에는 스테이지를 끝내주는 Ball(Level Warp) 하나가 뜬다. 갑자기 기분이 업(Up)되고 있다.
‘울랄라!’흥겨움에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리는데, 이번에는‘Extra Life’하나가 뜨는 것이 아닌가? 말 그대로 새생명 탄생이다. 그 Life 하나가 죽을 때까지 게임을 계속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니, 어찌 어깨춤이 절로 나지 않을 수 있으랴!‘아내 심부름을 성실히 하여 준 자여, 그대에게 내리는 복이니라.’ 허공중에서 이런 말이라도 들려오는 듯하다. 그와 함께 재미가 배가된다. 기분이 좋아지면 게임도 잘 풀린다. 인생사, 또 하나의 가르침을 배운다. 모든 일은 기분 좋게,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 긍정적 사고는 자기 암시의 예언적 효과,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를 가져온다고 하지 않던가? 옛날부터 힘든 일을 할 때에는 노래를 불렀다.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면 고된 일도 쉽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노동요(勞動謠)가 생겨난 연유이기도 하다.
게임, 그것은 재미 때문에 하는 일이다. 그래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를 때가 많다. 그것은 게임의 단점이라고 하겠다. 특히 공부를 해야 하는 어린이들이라든가, 한참 맡은 일에 열중해야 할 젊은이들에게 그것은 치명적인 문제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하지만, 직장에서도 용도가 폐기된 퇴직한 늙은이들에게는 어찌 생각하면 그것은 장점이랄 수도 있지 않을까? 주체하기에도 버거운 시간들, 그걸 재미로 환치할 수 있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점당 10원짜리 고스톱’도 때로는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지만, 혼자서 즐기는 Dx Ball이라면 그럴 염려도 전무할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에도 그만인 터수에다가, 덧붙여서 그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는 시간 때우기에도 안성맞춤이니, 그 어찌 마다할 일인가?
게임의 주체는 뒤바뀌어야 한다. 그러니까 게임이란 시간이야말로 황금(黃金)일 수 있는 어린이나 젊은이들이 하는 것보다는 늙은이들이 즐겨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는 말이다. 정년이 넘은 당신들, 우리 컴퓨터게임, 그 중에서도 벽돌깨기 게임인 Dx Ball이나 하면서 시간을 죽이도록 합시다.
게임을 하면서 한 가지 더 배워야 할 점은, 우리의 인생살이 모든 일이 그렇듯이, 노력만 가지고서는 안 되는 일, 게임에서의 승자가 되려면 다소간의 운(運)도 따라야 함을 잊지 말 일이며, 벽돌을 다 깨고 난 다음에 느낄 수 있는 성취감을 만끽할 수 있는 점도 덤으로 누리도록 하여야겠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다시 강조하는 말, 마나님이 부를 때에는 언제든지 지체없이 중단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야 벽돌깨기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 일이다.
벽돌깨기 컴퓨터 게임아, 나는 오늘도 그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노라.
(2020.6.26.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