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평화유지법

거북이3 2020. 7. 12.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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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유지법 
                                                      이   웅   재

하나.
아내가 말했다. DS마트로 아침 일찍 김칫거리를 사러 나가는데, 집에서 나가 한참 가다가 보니 뭔가 허전하더란다. 생각해보니 마스크를 안 쓰고 나간 거였단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마스크를 안 쓰고 나왔네!”
혼잣말이었다. 그런데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던가? 누군가가 아내 말을 받아 대꾸를 하더란다.
“어디 그런 게 한두 번인가요?”
아내는 ‘아, 다른 사람도 그럴 적이 더러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았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당신이 이겼어.”
“?”
아내는 무슨 말인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당신은 어쩌다 한 번 그런 거지만, ‘어디 그런 게 한두 번인가요?’라고 말한 사람은 그런 경우가 다반사라는 거 아니겠어? 그러니 당신은 아주 양호한 거지.”
나는 끝에서 맴돌던 말은 꿀꺽 삼켜 버렸다. ‘치매 따윈 걱정하지 말라구….’‘치매’라는 말은 그 말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둘.
아내가 알타리를 사 왔다. ‘알타리’는 ‘알타리무’의 약칭인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규범 표기가 ‘총각무’라고 한다. 실제로는 ‘알타리’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쓰는 ‘무우’도 그냥 ‘무’가 표준어라고 박박 우긴다.
“4묶음에 1만원, 2묶음에 6000원이라고 하는데, 그냥 2묶음만 사 왔어.”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아내의 말이다. 하지만, 그럴 때 무심코 지나가서는 좋은 남편이 못 된다. 무언가 그 일에 대한 평가를 내려주는 일이야말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남편의 책무이다.
“그렇지, 4묶음은 너무 많지? 아주 잘했어.”
그런 평가를 내리는 일에는 무슨 힘든 결정을 내릴 때처럼 이리저리 고민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가벼운 어조로 툭 던지듯이 한 마디 하면 만사 OK다. 표준국어대사전처럼 박박 우기지 않고도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해줄 수 있는 말인데, 아낄 필요가 없다. 돈이 드는 일도 아니잖은가?
예상대로 아내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팔을 걷어붙이고 김치를 담그기 시작한다. 나는 슬금슬금 아내 곁으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주방 서랍에서 조그만 칼을 하나 끄집어낸다. 다음 동작은 슬그머니 하는 것이 좋다. 바로 아내가 썰어 놓은 알타리무 조각 하나를 집어 들고 껍질이 아닌 살의 일부분을 도려낸다. 그리고는 그것을 맛본다.
안 보는 척하면서‘무얼 하나’궁금해 하던 아내가 한 마디 한다.
“맵지 않아?”
“응, 맛이 괜찮은데….”
이건 간접적인 띄워주기다. 직접적으로 ‘수고했다’느니 어쩌고 하다가는 오히려 퉁박을 맞는 수도 있으니, 이런 방법이 오히려 은근슬쩍 기분을 띄워줄 수 있는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지금 담근 알타리김치가 맛있게 익어주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셋.
우리 집 앞 발코니에는 화초들이 많다. 술을 좋아하는 나는 매년 6월이면 매실 30kg, 담금주 80L, 설탕 12kg쯤을 사다가 술독에다가 내가 1년 동안 마실 매실주를 담근다. 감초가 있으면 더욱 좋다. 그렇게 담가 놓으면, 매일 저녁 머그컵으로 1잔씩을 마실 수가 있다. 화초들은 그렇게 담근 술독 위에 올려놓기도 한다. 군데군데 돌절구나 다듬이돌을 놓아두기도 한다. 그러면 보기에도 좋으려니와 화초들이 잘 자란다. 놈들도 술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비실비실한 소나무 등에 막걸리 주사를 놓는 모습을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서 생겼는지 모르지만 민달팽이들이 화초들과 함께 공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초 잎에 희고 끈적끈적한 액체 따위가 묻어 있으면 바로 놈들의 짓이다. 발코니에는 아내가 필요로 하는 대파도 사다가 기다란 화분에 심어놓는데, 거기에도 예외 없이 민달팽이들이 자신의 영역 표시를 해 놓는 것이다.
나는 요새 그 민달팽이 잡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민달팽이, 아내가 질색을 하는 놈들이다. 그러니,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놈들은 오이나 참외, 수박껍질을 좋아한다. 해서 그런 껍질들을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화분 군데군데 놓아두면, 많을 때에는 10여 마리씩 몰려와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요즘 나의 아침 업무로는, 발코니의 방충망을 조금 열어놓고 그 민당팽이 놈들을 나무 막대기로 슬슬 밀어서 9층 아래 아파트 화단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놈들, 9층 아래로 떨어지면 즉사를 할지 안 할지는 내 소관 밖의 일이다.
그런데 민달팽이를 창 밖으로 버리는 일까지는 별 문제가 없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열어 놓은 방충망을 다시 닫아야 한다는 걸 그만 깜빡하고 잊어버곤 하는 것이다. 그러면 파리, 모기를 비롯한 온갖 벌레들이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발코니로 모여들곤 한다. 그러기를 3번째, 드디어 아내의 지청구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3번째에 가서야 처음으로 타박을 하는 것이니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라서,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한 마디 했다.
“글쎄, 나 원 참, 또 잊어먹었네.”
그 말 한 마디에 아내의 야단치는 소리가 스르르! 제 굴 속으로 들어가는 뱀 꼬리마냥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그렇게 서로의 늙었음을 무언 중 인정해가며 평화롭게 살고 있다.
(20.7.12.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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