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직한 남편 되기 2
이 웅 재 (017-754-6574)
서른셋의 나이에 결혼을 한 남자가 ‘믿음직한 남편’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서른셋까지 결혼 하나 못 하고 지냈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결혼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니까 말이다. 게다가 ‘無錢天地少英雄이요, 有酒江山多豪傑이라(무전천지소영웅이요, 유주강산다호걸이라 : 돈이 없는 천지에는 영웅이 적고, 술이 있는 강산에는 호걸이 많도다.)’는 말을 좌우명처럼 삼고 있는 처지이다 보니 더욱 그랬다. 부자가 되는 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 그러니까 ‘無錢天地少英雄’은 내 능력 밖의 문제이고 ‘有酒江山’이야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 그 ‘有酒江山’만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귀가는 항상 늦어지고, 그에 비례해서 남편 체면은 말이 아니게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런 판국에 ‘믿음직한 남편’이 되겠다는 건 그 발상조차 ‘무엄한’ 일임에 틀림이 없으렷다?
하지만, ‘믿음직하지 못한 남편’이란, 결혼 생활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주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믿음직한 남편’이 되기 위한 기회를 ‘호시침침(?)’ 엿보고 있었는데….
아내는 두 번째 임신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살림밑천인 딸, 생일은 7월 27일, 1953년이었더라면 휴전협정이 조인되던 날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통일이 되지 못하고 휴전이 되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분단국가가 되어 버렸지만, 서로 죽이고 죽어야 하는 총소리를 멈추었다는 점은 그래도 경축해야만 할 일이 아닐까? 우리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싸워야 할 일이 생겼을 경우에도 휴전으로 해결하라는 의도가 내포된 맏딸의 생일이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임신에서의 출산예정일이 또 같은 7월 27일이었다. 누구는 어쩌면 그토록 치밀한 계산을 하였는가 하고 감탄하기도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기실 나는 그렇게까지 놀랄 만한 계산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가난한 봉급쟁이, 그저 아이들 생일이라도 한꺼번에 차려 먹자는 의도였다고 치부해 두자. 어쨌든 아내는 만삭이 되어 배는 남산만 해졌다. 아니, ‘남산×2배’쯤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매일같이 술타령이었다. 푸근한 남산의 품속에서 지낼 수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7월 22일이었다. 그날도 기분 좋을 정도로 얼큰히 술에 취하여 통행금지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간에야 귀가를 하였다. 아내는 그때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술 마신 눈으로 보아도 낌새가 이상했다. 술이 확! 깨고 있었다. 그래, 나는 ‘믿음직한 남편이 되어야 해.’ 그래서, 나는 옷도 벗지 않고 말했다.
“병원 가자!”
“병원은 왜?”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당신 상태가….”
“아냐,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예정일도 아직 닷새나 남았는데….”
“그래도 이상해.”
나는 이상하다고 우겼다. 아내도 괜찮다고 우겼다. 이상하다, 아니다, 서로가 우겼다. 도저히 결판이 나지 않을 세염(勢焰)이었다. 해서 나는 결심했다. 강권을 쓰기로 결심했다. 강제로 아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사실 내가 강제로 아내를 끌고 나섰다고는 했지만, 아내가 못 이기는 척 동의하지 않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아내도 내 그 강제를 어느 정도는 동의하면서 따라 주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것은 어쨌든 시간은 바야흐로 통금시간 10분 전, 무척 다급한 때였다. 통금이 없는 요새 같으면 별 문제될 것이 없었을 것이었지만, 그때는 사정이 달랐다. 급기야 나는 대로변까지 나갔는데, 차도는 한산했다. 택시야, 제발…, 기도하는 마음으로 택시를 기다렸다. 통금시간 5분 전. 그 동안 5분이 흐른 것이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아니, 그토록 짧을 수가 없었다. 째깍째깍 통금시간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택시가 우리 앞에 섰다. 그러나 여차직하면 그냥 가 버릴 기세였다.
나는, “급합니다!”라는 말부터 꺼냈다.
“마리아 산부인과요.”
운전기사도 아내의 ‘남산×2배’쯤 되는 배를 보더니, 두말없이 우리를 태워 주었다. 12시가 거의 다 되어 병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은 이미 닫쳐 있었다.
두들겼다. 요새처럼 비상 벨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두들겼다. 힘껏, 힘껏 두들겼다. 한참을 두들겼다. 두드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드디어 반응이 왔다. 불이 켜지며 병원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시죠?”
“급해요! 산모예요!”
나는 우선 아내를 문 안쪽으로 밀어넣으면서 말했다.
“들어오세요.”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 목덜미에서는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날 밤, 아내는 우리 둘째, 셋째 아이를 낳았다. 쌍둥이였던 것이다. ‘남산×2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고, 쌍둥이다보니까 예정일보다 닷새나 먼저 출산을 하게 된 것이다. 둘 다 아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1녀 2남을 두게 된 것이다. 정말로 운수 대통이었다.
그날 아내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지 않고 술에 취한 김에 쿨쿨 자 버리고 말았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날 아내를 거의 강제로 산부인과로 데리고 간 것은 지금 생각해도 천만 번 잘한 일이었다. 그것 때문에 나는 ‘믿음직한 남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믿음직한 남편’,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남다른 직관이 필요하고, 남다른 결단력이 필요하고, 남다른 우격다짐도 필요한 일이라는 점을, 우리 남편들이여, 명심, 명심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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