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문턱에서

세모시 같은 추석

거북이3 2006. 8. 30. 10:52
 

       세모시 같은 추석

                                                      이  웅  재


 추석이다. 우리나라의 4대 명절, 아니, 최대의 명절, 추석이다.

 흐느적흐느적 늘어졌던 어깨들을 활짝 펴 보자. 즐거운 가을, 신나는 추석이 우리의 방문 앞에 조용히 와 서 있지 않은가!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면, 차분하게 들려오는 계절의 노크 소리가 정답다. 그리워, 그리워하던 님이 지금이라도 당장 방문을 열고 웃음 띤 얼굴을 들이밀 것 같이 느껴진다. 한여름의 땀에 절었던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가을의 맑은 바람과 볕을 시원스럽게 받아들이자. 여름의 잔재들이여, 빨리 물러가라. 인심이 흉악한 때이니 네 망령, 네 횡포가 통했지만, 가을의 티 없는 맑은 하늘 앞에서는 너도 염치를 가릴 줄 알아야 하느니.

 추석, 글자 뜻 그대로라면 󰡐가을 저녁󰡑이란 의미다. 우리가 어렸을 때 자라나던 시골의 가을 저녁 풍경을 한번 추억해 보자. 국화꽃이 함초롬히 피어 있는 뜨락에 저녁이 내리면, 밥 짓는 연기가 어둠과 함께 마당을 가로지르고, 하루 일손에 피곤해진 몸을 끌고 온 가족이 한데 모여 강냉이라도 뜯을 수 있는 단란함이 있어 푸근했다.

 무엇보다도 추석에는 밝은 달이 있어 마음이 깨끗해진다.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를 보면, 천지지간에 모든 물건들은 각기 주인이 있어서 터럭 끝 하나라도 마음대로 취할 수 없으되, 오직 󰡐강 위의 바람󰡑과 󰡐산 속의 명월󰡑은 조물주의 무진장한 창고로서 마음대로 취하여도 이를 금할 자가 없다고 하였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달이 있는 추석을 맞을 수 있으면 마음이 넉넉해졌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 태백이 놀던 달아……󰡑, 달은 그만큼 우리들 모두의 마음 속 깊숙이 향수를 가져다주는 사물이다. 달 속에 계수나무가 있고 옥토끼가 방아를 찧고……. 그나 그뿐인가? 살결도 백옥 같은 선녀 항아(姮娥)가 살고 있어 우리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어 주고 있지 않은가?

 뭐니뭐니 해도 추석은 달로 인해서 그 맛이 배가된다. 둥두러니 동산에 떠오르는 대보름달[望月]을 보며 애태우던 님과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남 몰래 속으로 빌고 있는 어느 수줍은 처녀의 마음도, 그리고 이웃 마을끼리의 횃불 싸움도, 다 이 달님의 덕분에 맛볼 수 있는 구수한 맛들이 아닌가? 추석을 달리 월석(月夕)이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리라. 달이 없는 추석이란 아무래도 격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어쩌다 비라도 오든지 또는 잔뜩 흐린 추석이 되면 사람들은 일 년 내내 기다려 왔던 보름달[望月]을 보지 못해 못내 서운해지는 것이다.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어디서 어린 아이들의 합창이라도 들려오는 듯싶다. 󰡐강강수월래󰡑도, 돌담길을 걸으려 하여도, 달빛만은 있어야 제격이라 생각된다. 달빛이 교교히 비쳐드는 가을 밤, 생각만 해도 센티멘털해지는 한국적 정취가 아니랴! 짝사랑하는 그리운 님에게 편지를 쓰려거든, 이러한 가을 달밤에 쓸 일이다. 가을 달밤이라면 그만큼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얘기가 술술 풀려나올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젊은 남녀라면 누구든 가을 달밤에는 시인이 되어 보아라! 달, 달이 있는 추석이 이제 다가오고 있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보면, 추석만이 양반이나 상민뿐만 아니라 조(皂:병졸), 예(隸:노예), 용(傭:고용인), 개(丐:거지) 등 모든 사람들이 부모의 산소에 성묘하는 날이라 적혀 있다. 추석이 되어도 벌초를 하지 않은 무덤은 자손이 없는 임자 없는 무덤이거나 자손은 있어도 불효하여 조상의 무덤을 돌보지 않는 경우여서 남의 웃음거리가 된다.

 마침 햅곡식이 나오기 시작할 때라서 처음으로 수확한 것을 가지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면서, 오랫동안 흩어져 살던 집안 식구나 친척들이 서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도 되는 것이 추석이다. 있어야 할 얼굴들이 다 보이면 마음이 그만큼 풍요로울 수가 없어 덩실덩실 춤사위라도 나올 법하다. 그러나 반면 보고 싶던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얼마나 살림에 쪼들렸으면 오늘 같은 날에도 함께 하지 못하는고?’ 하고 콧날이 시큰해지는 것이다. 한창 바쁘던 일손을 잠시 그치고 떡이며 술 등을 푸짐히 장만해 놓고 배불리 먹어가며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우면서 푸욱 쉬어볼 수 있는 명절이라는 점에서도 추석은 매우 의의가 깊은 날이라 하겠다. 이러한 명절을 다른 때도 아닌 8월 대보름, 휘영청 밝은 달을 택하여 정하여 놓은 우리 선인들은 진실로 멋을 아는, 풍류를 아는 선비다워서 더욱 추석절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팔월 한가위라 하면 한산 세모시 같은 느낌이 든다. 온기가 없는 달의 아름다움이 연상    되어 그렇기도 하려니와…… (朴景利의 󰡒土地󰡓중에서)


 얼마나 깨끗한 추석의 이미지인가? 각박한 세상에서 찌들 대로 찌든 얼굴의 주름살들을 펴고 추석날만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지내자. 이날만은 신문을 비롯한 모든 대중매체들도 회색 빛깔의 느낌이 드는 기사나 뉴스는 일절 보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명랑한 뉴스, 밝은 소식만을 전해 주는 날이 일 년에 하루만이라도 있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매스컴이라면, 우리들 모두가, 뉴스를 만들어 내는 우리 국민들 모두가 우중충한 사건들은 만들어 내지를 말자.

 추석날만은 꼭 맑은 날이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의 밝은 가을 달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달빛 아래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이 성공하기를, 농민은 풍작을 감사하고, 군인은 통일을 기원하고,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자신이 목표하였던 바를 무난히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추석이다.

                                      (06. 8. 30. 원고지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