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수필 순례 2)
외부(畏賦)
이 규 보 지음
이 웅 재 해설
독관처사(獨觀處士)란 분이 집에만 들어앉아 사는데, 늘 두려움이 있어 제 얼굴을 돌아보고 두려워하며, 그림자를 돌아보고 두려워하고,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모조리 두려워한다. 충묵(冲묵묵할 묵) 선생이 찾아가 그 까닭을 물으니 처사가 하는 말이,
“하늘과 땅 사이에 누가 두려움이 없을쏜가? 뿔 달린 놈, 이[齒] 가진 놈, 날짐승, 길짐승, 꾸물꾸물 온갖 벌레들의 그 종족이 수없이 퍼지되, 모두 제 생명을 아껴 딴 족속을 무서워하니, 하늘의 새는 매를 두려워하며, 물속의 고기는 물개를 두려워하며, 토끼는 사냥개를, 이리[狼]는 들소[兕(시)]를 두려워하고, 사슴은 살쾡이를 두려워하며, 뱀은 멧돼지를 무서워하고, 사납기론 범․ 표범이 으뜸이로되 사자를 만나면 도망친다. 이런 따위가 하도 많아 이루 자세히 적을 수도 없네. 짐승이 그렇거니, 사람도 마찬가지라…(중략) … 나 같은 하잘것없는 조그마한 것이 뭇 사람 사는 세상에 섞여 있어, 저들은 교(巧), 나는 졸(拙), 내가 하나면 저들은 천(千), 땅 밟으면 가시 생겨 모두 무서운 길이 되니, 두려움 없이 막 달리면 열 걸음에 아홉은 넘어질 것이라, 소름 오싹, 두렵지 않을쏜가? 나는 이제부터 오뚝 높이 혼자 서서 짝과 무리를 떠나, 아득히 빈 터에 노닐까 하노니, 그대는 어이 생각하는가?”
충묵 선생이 오연(傲然)히 안석을 의지하여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그와 다르외다. 하늘의 위엄도 내 안 두렵고, 만승(萬乘: 天子)의 부귀도 내 안 두려우며, 폭력배(暴力輩)의 주먹도 내 안 두렵고, 맹호의 으르렁거림도 내 안 두렵소.”
말이 채 끝나지 않아 처사가 깜짝 놀라 일어나며,
“그대가 자신을 헤아리지 못함이 너무나 심하외다. 어찌 그리 말을 쉽게 하는가? 높이 계신 저 하늘이 선․ 악을 굽어 살피나니, 혹시 진노하면 뇌성벽력이 갑자기 일고, 폭풍이 섞여 불어 모래와 돌을 막 날리며, 바다가 장님 되고 산이 귀가 먹어, 와르르 출렁, 와지끈 뚝딱, 번개 날(刃)이 번뜩, 빛이 번쩍번쩍, 하늘이 쫙 찢어지는 듯, 땅이 쩍쩍 갈라지는 듯,…(중략)…이렇듯 하늘의 위엄이 무섭거늘, 그대 어이 두려울 것이 없다 이르는가?”
선생이 말하기를,
“바름[正]을 지켜 안 속이면 하늘이 내게 위엄부리지 않으리니, 내 어이 그를 두려워하리.”
처사가 말하기를,
“금상(金床)이 번쩍번쩍, 어좌(御座)의 장막이 깊숙한데, 어로(御路)엔 엄숙히 순찰하는 계엄(戒嚴)의 소리, …(중략) … 쉬쉬, 예예, 백관(百官)이 늘어섰네. 이에 노하면 갑자기 눈서리가 내리고, 꾸짖으면 금방 벽력이 일어나, 한번 불경(不敬)이 있으면 멸족의 무서운 재앙, 이렇듯 천자의 위엄이 무섭거늘, 그대 또한 두려움이 없는가?”
선생이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높낮음이 마치 갓[冠]과 신[履] 같으니, 아래서 위 섬길 제 굽혀 절함이 법에 맞고, 바라볼 때 무릎 꿇고, 절할 적에 머리 조아리고, 명령 받곤 더욱 굽실, 맡은 구실 잘 지킬지니, 이러하면 임금이 어찌 위협이 되며, 신하가 어찌 두려움 있으리.”
처사가 말하기를,
“저 분육(賁育)1) 같은 장사배(將士輩)가 성이 나 늑대마냥 돌아보면 ‘흥’ 소리, ‘에끼’ 소리에 풍운이 와락 일어, 대낮에 살인이요 저자에 피바다라.…(중략)… 이는 자객(刺客)의 강포(强暴)함이라. 그대 또한 두려움이 없는가?”
선생이 말하기를,
“낯에 뱉은 침은 그대로 말리우고,2) 가랑이 밑으로 숙이고 나가3) 허심(虛心)하게 세상을 살아가면, 내가 저들 안 건드리매 저들이 어이 성날 것인가? 이 또한 두려울 것 없으리.”
처사가 말하되,
“새끼 밴 범이 굴을 나와 고기를 골라 피를 빨 제, 이[齒]를 갈고 발톱을 울리니 그 소리 쩌렁쩌렁, 한번 ‘으흥’ 소리에 바람이 일고, 한번 할퀴자 번개가 번쩍, 날개 없이 휙 날아 순식간에 만리 길, 제아무리 범 잘 치는[搏] 풍부(馮婦)4)로도 기가 질려 얼빠지니, 이는 사나운 범의 으르렁댐이라, 그대는 어찌하리오?”
선생이 말하기를,
“낀 것[무기], 베푼 것[함정과 그물]이 있으면 족히 놀랄 것 아니로세.”
처사가 말하기를,
“그러면 그대의 두려워하는 건 과연 무엇인가? 있는가, 없는가?”
선생이 말하기를,
“낸들 어찌 없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나의 두려운 바는 외물(外物)에 있지 않고 바로 내게 있노니, 턱 위 코 아래에, 속에는 이[齒], 밖에는 입술, 열렸다 닫혔다 문과도 같은 것. 물건이 이로 들고 소리가 이로 나서 진실로 없어선 안 될 것이로되 안 두려울 수 없는 곳일세.…(중략)…그러므로 성인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입을 두려워했으니, 입을 곧 삼가면 처세에 무슨 탈이 있으리.…(중략)… 입은 몸을 망치는 것, 말이 나자 화 따르네,…(중략) …”
처사가 듣고 자리를 옮겨 머뭇거리며 낯빛을 고치고 하는 말이,
“제가 불초(不肖)하였거늘 이제 선생의 가르침 듣자오니 환히 멀었던 눈을 뜨고 해를 봄 같사오이다.”
해설:
요즈음 막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일이 허다하다. 그래서 하늘의 위엄도, 만승(萬乘: 天子)의 부귀도, 폭력배(暴力輩)의 주먹도, 맹호의 으르렁거림도 두렵지 않으나, 오직 입을 두려워한다는 충묵 선생을 내세워 풍자 및 경계를 하고 있는 이규보(李奎報)의 「외부(畏賦)」를 소개한다. ‘중략’ 부분은 주로 용사(用事) 부분이라 없어도 문의에는 지장이 없겠기로 생략하였다. 조동일은 사(辭)와 부(賦)를 교술로 보고 있어 역시 수필 장르라 할 수 있겠다.(한국문학통사 제1권. 知識産業社. 1982. p.21-22.)
지은이 이규보 (李奎報: 1168~1241년)는 고려 무신집권기의 신흥사대부로서 민족의 대문호이다.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시·술·거문고를 즐겨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도 했다. 9세 때부터 작문에 능했고, 경사(經史)․ 백가(百家)․ 노불(老佛)의 문헌들을 모두 섭렵하여 한번 읽기만 하면 기억하는 기재(奇才)였으며, 특히 주필(走筆)에 능했다. 17세 때에는 해좌칠현(海左七賢)의 대표자격인 52세의 오세재(吳世才)와 벗으로 지냈을 정도였다.
[그는 46세 때, 최충헌(崔忠獻)의 집에서 열린 야연(夜宴)에, 8품의 미관(微官)으로서 초대되어 문재가 인정된 일화는 극적으로, 그의 문재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이때 최이(崔怡, 나중에 이름을 瑀로 바꿈)는 그에게 ‘走筆’을 시험해 달라 부탁했다. 이인로(李仁老)가 운을 불러서 ‘燭’을 시제로 하여 40여 운에 이르렀는데도 물 흐르듯 이어 나갔다. 최이는 탄상하여 마지 않았고, 다음날 그 부 최충헌에게 시험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최충헌은 내키지 않았지만 이가 재삼 보챘으므로 이것을 승낙했다. 이인로가 소입(召入)되고 시를 지을 때 술을 들지 않고는 시의(詩意)가 떠오르지 않는다 하여 집에서 술을 들어다가 취했다. 이에 이가 필갑에서 붓을 꺼내서 그에게 건네 주었다. 때에 정원에서는 공작이 놀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제로서 금의(琴儀)가 운을 불러 40운에 미쳤는데, 운이 떨어지자마자 한 순간에 시를 지으니, 충헌도 이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릴 정도였었다. 물러가려 하자 충헌이 관(官)이 소원이라면 무엇인가 말하라고 했다. 그는 “지금 8품이니까 7품으로 빼 주었으면 족하다.”고 했다. 최이가 눈짓을 하여 “6품을 원해라.” 했으나, 그는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후에 이가 힐책하니 그는 “내 뜻이라.”고 대답했다.
(金東旭. 國文學史. 日新社. 1997. pp.72-73.)]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백운소설(白雲小說), 동명왕편(東明王篇), 국선생전(麴先生傳),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등이 있다.
1) 옛날의 용사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힘에는 오획(烏獲), 날래기는 경기(慶忌), 용맹 은 분육”이라는 말이 있다.
2) 당나라 누사덕(婁師德)은 성질이 너그러웠는데, 그 조카를 지방에 벼슬시켜 보내면서, “처신(處身)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다른 사람이 낯에 침을 뱉더라도 손으로 닦고 대항하지 않겠습니다.”하였더니, 누사덕은, “그것은 안 될 말이다. 닦으면 그 사람이 노할 것이니 그대로 말려야 한다.”고 하였다.
3) 한신(韓信)이 젊었을 때 시정(市井)의 젊은 백정들이 위협하며, “죽든지 내 바짓가랑이 밑으로 지 나가든지 하라.” 하니, 분을 꾹 참고 머리를 숙이고 가랑이 밑으로 나갔다.《史記》
4) 전국시대 진(晋) 사람. 범을 잘 때려잡았는데, 뒤에 얌전한 선비[善士]가 되었다.《孟子》
** 한문 번역은 민족문화추진회의 『동문선 1』을 따랐으나 맞춤법, 띄어쓰기 등과 문맥을 살리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윤문을 하기도 했음을 밝혀 둔다.
'우리의 고전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전수필 순례 6) 공방전(孔方傳) (0) | 2006.12.30 |
---|---|
(고전수필 순례 4) 조신몽(調信夢) (0) | 2006.12.30 |
(고전수필 순례 3) 석문(石問) (0) | 2006.10.08 |
(우리의 고전 수필 1) 화왕계(花王戒) (0) | 2006.07.30 |
제 15회 수필문학 하계세미나 질의서 (0) | 2006.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