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 탐방기

(중국 문화 체험기 10) 일행 3명과 이산(離散)의 고통을 맛보다

거북이3 2006. 10. 22. 09:04
 (중국 문화 체험기 10)

        일행 3명과 이산(離散)의 고통을 맛보다

                                                                                      이   웅   재

 한참 달리는 차를 야광봉 비슷한 것으로 세우는 사람이 있다. 이곳의 차량 통제를 하는 사람인가 보았다. 어제 오후 장가계 쪽 호수 옆길에 바위가 떨어져 길이 막혔다고 일정을 바꾸란다. 해서 장가계 쪽 십리화랑(十里畵廊)부터 보려 했었는데, 할 수 없이 황룡동(黃龍洞) 동굴부터 관광키로 했다.

 동굴 쪽으로 가는 곳엔 화장실이 별로 없었는데, 동굴 직전의 공중화장실은 좀 특이했다. 대변을 보는 곳에 문이 없는 것이었다. 사람은 많고 화장실은 하나밖에 없으니 시간절약을 해야겠다는 발상으로 존재하는 화장실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 곳에서도 변이 나올 수 있을까? 하지만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 용변을 보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배설도 후천적 문화라는 점을 분명히 알 수가 있었다. 찰칵! 더러운 화장실 사진 한 장을 찍은 연유이다.

 황룡동 동굴 또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엄청나게 컸다. 20ha, 총 길이 11.7km의 어마어마한 규모, 4층으로 이루어진 동굴이었다. 2층은 마른 동굴, 2층은 물이 있는 동굴로 동굴 내의 계단만 3,000개, 다리 관절이 시원찮은 나는 이곳에서도 엄청 고생을 하면서 걸어다닌 곳이다.

 이 동굴은 1983년에 발견, 이듬해 대외에 개방했단다. 동굴 안에는 1곳의 물고(물구덩이)와 2곳의 하류, 3곳의 폭포, 4곳의 연못, 13개의 궁정, 96개의 길이 있단다. 동굴 속에 동굴이 있고, 동굴 속에 산이 있고 강이 있으며, 산과 강이 서로 엇갈리고, 그 사이사이로 좁다란 길이 꼬불꼬불 이어졌으며,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석순, 석주, 석화, 돌 장막, 돌 가지, 석관, 돌 진주, 돌 산호 등 그 종류로 보아도 없는 것이 없고, 그 생김새로 보아도 무궁무진했다. 미궁(迷宮)은 정교하며 아름답고, 용궁(龍宮)은 넓고 웅위했다. 제2층 동굴 속 향수하(口向 水河) 는 총 길이 2km, 깊이 6m로 배까지 타고 유람하였다.

 정해신침(定海神針)이라는 곳은 높이가 27m에 달하는 황룡동 제일의 종유석으로서 기이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곳은 1998년 중국 평안보험공사라는 보험회사에서 1억워(인민폐)의 보험을 든 것으로도 유명한 곳이란다.

 이와 같은 거대 동굴은 아직도 미개발로 오픈되지 않은 것이 많단다. 개발할 수 없어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조금씩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했다. 이곳도 3년 전쯤 일본에 홍보하고, 요새 한국인에게 홍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광객이 한국인이었던 모양이다. 다시 3년쯤 지나서는 유럽 쪽으로 홍보할 예정이란다. 우리가 얕잡아 보고 있었던 그들은 관광정책 하나에서도 이처럼 놀랄 정도로 치밀했다.

 중국 여행들을 많이 해야겠다. 왜? 젊어질 수 있으니까. 어떻게? 그냥 중국으로 오기만 하면 젊어진단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1년이 지나야 한 살이 되기 때문이다. 1년 미만은 0살이란다.

 황룡굴 관광을 마치고 오전에 가려고 했던 십리화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떨어진 바위는 아직까지도 다 치우지 못하고 있어서 차량이 지나다닐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버스를 내려 길을 꽉 막고 있는 바위와 바위 사이를 위태롭게 걸어서 넘어갔다. 그리고 임시로 여기까지만 운행하고 있는 상대편 쪽 버스를 탔다. 그런데 그 버스는 작은 셔틀버스여서 우리 일행이 같은 버스에 다 탈 수가 없었다. 문제는 거기서 생겼다. 일행 3명이 다음 버스를 탔는데, 십리화랑 입구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는다. 외국이라서 핸드폰 연락도 되질 않으니 난감할밖에. 가이드가 중국인들의 핸드폰까지 빌려서 이리저리 연락하여 고생고생 끝에 가서 데리고 왔는데, 그 버스는 케이블카 타는 쪽으로 갔었다는 것이다. 한 시간이 넘게 이산가족 찾기 연습을 하고 나니 맥이 다 빠져 있었다. 외국에서는 서로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느끼게 된 사건이었다.

 그 동안 일행은 화랑 입구에 주욱 늘어서 있는 가게들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시간을 보냈다. 온갖 종류의 기념품들을 파는 가게들이었는데, 웬만한 건 1,000원, 때로는 1,000원에 두 개였다. 말하자면 모두 1회용으로 생각하고 있는 기념품들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1,000원짜리가 1,000원에 두 개, 1,000원에 세 개…식으로 점점 가격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중에는 다섯 개까지 가져가라는 것이어서 별로 필요도 없는 자수정 야광 팔찌 등을 너도나도 사게 되었다. 그쪽 장사꾼들에겐 어제의 산사태가 그들의 장사를 도와준 셈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