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베트남 문화 체험기

(캄보디아, 베트남 문화 체험기 5) 천상의 무희 압사라의 애절한 구애의 춤

거북이3 2007. 2. 19. 21:31
 

(캄보디아, 베트남 문화 체험기 5)


        천상의 무희 압사라의 애절한 구애의 춤

                                                                     이   웅   재

 

  2층 인간계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곳은 일반인들에게는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곳이란다. 그러고 보니 3층의 천상계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 왕과 승려뿐이라는 것에서 그 까닭을 찾을 수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말하자면 수리야바르만 2세는 자신을 비슈누신과 합일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2층은 자신과 가까운 높은 신분의 사람들에게만 출입을 허용했고, 일반인은 1층 이외에는 드나들 수가 없었다. 결국 일반 백성은 축생이며 미물이었던 것이다. 앙코르와트의 저주는 어쩌면 지당한 일이 아니었을까?

 2층 회랑의 외벽에는 1,282명의 압사라 부조가 있다. 압사라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유의 바다 젓기에서 탄생한 천상의 무희이자 궁녀라고 하겠다. 풍만한 가슴과 육감적인 모습의 압사라, 앙코르에만 수만 명의 압사라 부조가 있는데,  같은 손 모양, 같은 표정은 하나도 없단다.

 중국 신화의 여와(女媧)가 인간을 창조할 때에는 새끼줄을 흙탕물에 넣었다가 꺼내 휘둘러서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었기에 그 모습이 하나하나 다르다고 했다. 각자의 개성이라는 면에서는 납득할 수 있는 인류 창조의 신화였지만, 그렇게 해서 탄생한 피조물들이 압사라처럼 아름다울 수는 없어서 좀 아쉬웠는데, 이곳의 압사라들은 모두가 다 아름다웠다.

 압사라 복장의 특징은 상의를 입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했다. 가이드의 말로는 상의뿐만이 아니라 전라(全裸)라는 것이다. 머리칼이 길어서 그 머리칼을 엮어서 온갖 장식을 하여 나신(裸身)의 보여서는 안 될 부분들을 가리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채 가려지지 않은 가슴과 유두는 호사가들의 손때가 묻어 반질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반질거리는 나신의 유방은 한 번쯤 만져보고픈 유혹을 느끼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나중 석식 때에는 압사라 댄스를 관람하였다. 그 춤은 샴족에 의해 나라가 멸망할 때 왕궁에 있던 수천 명의 압사라 무희들이 잡혀가는 바람에 명맥이 끊겼던 것을 다시 받아들인 것이란다. 압사라 댄스는 다른 전통춤들과 함께 선보였는데, 무희들은 모두가 소녀티를 갓 벗은 예쁘장한 아가씨들이었다. 그렇다. 틀림없는 압사라들이었다.

 처음 탄생한 6억 명의 압사라, 그리고 앙코르에 있는 수만의 압사라, 다시 거기에서 선택받은 1,282명의 압사라, 그 중에서도 천상계에까지 왕을 따라 올라가 왕의 총애를 받았던 극히 소수의 압사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녀들은 모두 5명이었다. 부조에 조각된 압사라처럼 전라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유연한 곡선의 아름다운 몸매를 그대로 드러나게 해 주는 타이트한 옷맵시로 느릿느릿 추는 춤은 매우 관능적이었다.

 느림, 전통적인 관념으로 볼 때 느림이란 여성성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다. 스란치마를 입고 안방과 건넌방을 오가며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안방마님의 행동이 촐싹거려서는 안 된다. 모처럼 바깥양반을 모실 때까지도 은근해야 했다. 느림은 음(陰)이었다. 그 음으로 양(陽)을 수용한다. 그건 바로 생명 탄생의 제의가 된다. 격렬한 양의 운동을 음은 부드럽게 감싸면서 기다린다. 극도로 고조되었던 양의 움직임은 결국 음에게 제압되어 축 늘어지게 마련이다. 그게 음양의 조화다.

 그러니 압사라 댄스는 느려야지만 한다. 내어뻗는 팔 끝의 손가락 하나하나의 춤 동작이 보는 이로 하여금 호흡을 멎게 할 정도로 느리다. 게다가 애절하다. 모든 염원을 한 곳으로 수렴한 정서, 애절함으로 호소한다. 남성들의 약점을 아주 효과적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호흡만 멎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시선도 묶어둔다. 세상의 모든 양기를 음의 세계로 빨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다. 고요가 흐른다. 그 가운데서 양은 혼자 헐떡인다. 음은 더할 수 없는 모성으로서의 너그러움으로 그 맹렬한 움직임을 용납한다.

 압사라 댄스는 구애의 춤이다. 6억에서 수만으로, 다시 1,282에서 극히 소수로서의 선택을 받기 위한 섹슈얼리티한 춤인 것이다. 그러니 압사라가 조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시절의 가치판단으로서는 음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므로. 아니, 그건 현대의 관점에서도 비슷하다. 우리는 스파이더맨처럼 건물의 벽을 마음대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자동차보다도 빨리 달리고 트럭도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원더우먼에게서는 그 초능력에 박수를 보낼 수는 있을지언정 그들의 가슴과 유두를 반질반질하게 만들고 싶어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그 춤은 단지 외화벌이의 수단으로만 전락해 버렸다. 캄보디아, 지금 같아선 안 된다. 압사라 댄스를 위해 반주를 하는 총각들은 전혀 수리야바르만 2세를 닮지 않았고, 전승으로 의기양양한 앙코르제국의 장군들답지도 않았다. 그들은 가난한 티가 줄줄 흐르는 소년티가 아직도 남아있는 캄보디아의 사내아이들이었다. 노래를 부르던 백 뮤직 담당의 소녀는 관람객들의 시선이 춤으로 이동되는 것을 확인하면서 뜨개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압사라로 분장한 무희들만이 육감적인 춤사위를 보여줄 뿐이었다. 캄보디아, 언제쯤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뜨개질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하는 일임에 틀림없겠지만, 그건 압사라춤을 죽게 만드는 일, 그러니까 오히려 외화를 도망가게 만드는 일이 아니런가?

 압사라는 압사라의 흉내로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압사라는 외국의 관광객들의 마음까지 움직여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진정한 압사라 댄스로 다시 탄생할 수 있을 것이요, 캄보디아 고유의 전통춤으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외국 관광객들의 지갑을 열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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