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령길을 걸으며
이 웅 재
‘길’이란 ‘길다’고 해서 ‘길’입니다. 길게 이어져 있는 것, 어디론가에 연결시켜 주는 것, 낯선 새로운 세계로 이어주는 곳,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떠나고 싶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길입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만남을 이루어주는 것이 바로 길인 것이지요.
‘길’을 한자로 쓰면 ‘길 로(路)’ 자가 되지요. 그 글자의 부수 글자는 ‘발 족(足)’ 자입니다. 길은 발로 걸어야 제맛이라는 것이지요. 그러한 길 중에서도 가장 걷고 싶은 길은 우마차나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나 고속도로 같은 길은 아닐 것입니다. 그 길은 누구에게나 아마도 ‘폭이 좁은 호젓한 길’인 오솔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도 숲속으로 난 오솔길이라면 더욱 걸어보고픈 길이 되겠지요.
바로 그러한 길 중의 하나가 ‘우이령길’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걷고 싶은 오솔길에 애절한 사연이 덧붙게 된 것은 1934년이었습니다. 만남으로만 얘기되지 않는 길, 떠나보내는 애틋한 이별의 슬픔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길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로 시작되는 노래가 지어졌던 것입니다. 한국의 슈베르트라 불리는 이흥렬(李興烈) 씨가 작사 작곡을 하고 메조소프라노 백남옥 씨가 애조 띤 가락으로 불러 만인의 가슴 속을 파고 들었던 노래입니다. 구전에 의하면 그 노래에 나오는 바위고개가 이 우이령고개라고 합니다. 정작 바위고개가 어느 고개이냐는 질문에 이흥렬 씨 자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징적인 고개이며, 삼천리 금수강산 우리의 온 국토가 바위고개”라고 말했다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서 이 우이령고개라는 설이 신빙성을 얻고 있고, 그 구체적인 증거로는 우이동 59의 1번지 덕성여대 앞쪽에 있는 솔밭공원에 세워져 있는 ‘바위고개 노래비’를 들 수가 있습니다. 1만여 평의 터에 수령 100년이 넘는 소나무 100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는 공원에 세워져 있는 노래비에는 ‘바위고개’ 노래 3절 중 2절까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노래비의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도 보입니다.
" … 작품의 배경인 바위고개는 지금의 우이령을 지칭한다고 전해진다."
여기 참고로 ‘바위고개’ 노래의 가사 전문을 옮겨봅니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 납니다.
바위고개 피인 꽃 진달래꽃은
우리 님이 즐겨즐겨 꺾어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 년 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바로 금년은 ‘바위고개’의 작사, 작곡가인 이흥렬 씨의 탄생 100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 길을 걷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1909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해서 일본 동경음악대학에서 피아노 전공을 하고, 귀국 후에는 배재중, 풍문여고의 음악교사를 거쳐 서라벌예대, 숙명여대 교수를 지냈으며, 예술원 회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창 젊은 나이인 25세 때 이 노래를 지었습니다. 최근에는 조영남 씨의 시원스런 목소리로도 이 노래를 들을 수가 있게 되었지요.
이 고개는 6 ․ 25 때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로 넓혀집니다. 미군 공병대가 작전도로로 넓힌 것이지요. 비포장 흙길을 군용트럭들이 먼지를 뽀오얗게 일으키면서 달렸습니다. 한 많은 미아리고개와 함께 전쟁의 비극을 증언하던 길이었습니다.
휴전이 된 이후로는 오솔길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정취가 있는 등산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과 도봉산의 경계지점에 있는 우이령의 경관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오른쪽으로는 도봉산의 오봉이 그 아름답고 꿋꿋한 자태로 내려다보고 있고 그 근처에는 특히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습니다.
‘바위고개’ 노래에서도 나왔던 진달래꽃은 우리 민족과는 아주 친근한 꽃입니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구황(救荒) 식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꽃이지요. 그렇게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참꽃’이라고도 했답니다. 그에 비해 철쭉꽃은 독성이 있어서 먹을 수가 없었지요. 때문에 ‘개꽃’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진달래꽃은, 같은 과의 철쭉꽃으로 생각되기는 하지만, 향가 ‘헌화가’에서부터 등장하고, 유명한 정송강의 ‘관동별곡’에서도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 꽃입니다. 요즈음에는 가로의 단장, 아파트 단지 또는 빌라의 환경미화를 위해서 사용되는 꽃들이 대부분 영산홍이라서 약간은 씁쓰름한 기분이기도 합니다. 영산홍은 진달래꽃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개량된 품종인 것입니다. 진달래꽃과 철쭉꽃의 중간 시기쯤에 피어나지요.
이상하게도 진달래꽃은 비극적 이미지를 가져다주는 꽃입니다. 진달래꽃의 한문 명칭은 ‘두견화(杜鵑花)’이지요. 이름이 그렇다 보니 믿었던 사람에게 배반당하여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고서 돌아갈 수 없음을 한탄하여 ‘불여귀(不如歸)’를 읊어대는 ‘두견새’의 이미지가 전이된 까닭이겠습니다.
그런 것은 어쨌든, ‘진달래꽃’ 하면 누구나 소월의 시를 떠올릴 것입니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가 보지는 못했지만, 영변에는 약산(藥山)이 있고, 약산에는 동대(東臺)가 있다고 합니다. 그 동대의 진달래꽃이 그렇게 아름답다네요. 그걸 두고 소월이 ‘진달래꽃’을 읊은 것이지요.
진달래꽃은 붉은 빛입니다. 한 마디로 ‘단심(丹心)’을 나타내는 꽃이지요. ‘단(丹)’이란 단사(丹砂) 또는 주사(朱砂)를 가리킵니다. 바로 인주(印朱)를 만들 때 사용하는 원료입니다. 인주는 물감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물감은 시간이 지나가면 변하지요. 단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단가마이불가탈기적(丹可磨而不可奪其赤)’이란 말이 있습니다. ‘단사는 갈아 없앨 수는 있지만 그 붉은 빛을 빼앗을 수는 없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단심’이란 말은 ‘단과 같은 마음’, ‘변하지 않는 마음’을 뜻하는 말이 되었던 것입니다.
님은 내게서 떠나갑니다. 그러나 나는 진달래꽃과 같은 ‘단심’으로 님을 떠나보냅니다. 야속한 님이지마는, 작중 화자는 떠나는 임을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냥 보내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달래꽃까지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겠다'고 합니다. 그 얼마나 쓰린 마음이겠습니까? 그러한 정서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가시리>, <서경별곡(西京別曲)> 등을 거쳐서 국민 노래인 <아리랑>으로까지 계승되고 있습니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이별은 아리고 쓰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리랑’은 흥겨운 노래이기도 합니다. 아리고 쓰린 마음을, 가슴 속에 맺혀진 한(恨)을 흥겨움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한’이 ‘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한 단계 넘어서 ‘한풀이’로 바꿔치기하는 것입니다. ‘한풀이’- 그건 바로 ‘신바람’ 또는 ‘신명’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고 비통한 한 마디를 내뱉습니다. 그 이별의 슬픔이 지구 전체의 무게와 같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걸 혼자 떠받들고 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김소월이 저는 존경스러워집니다. 어떻게 하면 이별을 당하면서도 그 진달래꽃처럼 붉디붉은, 변하지 않는 사랑의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닮아보고 싶습니다.
한편, 우이령고개는 1968년 또다시 비극적인 사건으로 얼룩지게 됩니다. 그해 1월 21일, 북조선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의 무장 게릴라 31명이 이 길을 따라 침투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전향해서 모 교회의 목사로 계시는, 당시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金新朝) 씨는 당시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고 그 침투 목적을 설파하는 바람에 모든 사람들이 치를 떨었던 일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 이후 이 길은 길 양쪽 끝 지점쯤에 군부대가 들어섰고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그 후 1983년도에는 북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이 되어 예로부터 동쪽의 금강산, 서쪽의 묘향산, 남쪽의 지리산, 북쪽의 백두산과 더불어 그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던 오악(五嶽)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산은 원래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세 높은 봉우리로 인하여 삼각산(三角山)이라 불리었었고, 그 산세가 아름다워 화산(華山)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신라 시절에는 멀리서 바라다보는 산의 모습이 마치 어린애를 업고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했었습니다.
사람이 산에 서 있는 모습이 신선 선(仙)자요, 골짜기에 내려와 있으면 속인 속(俗)자가 됩니다. 산도 길도 사람들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의미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가급적이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1993년 당국에서는 우이령을 확장하고 포장도로를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편하고 보자는 인간들의 얄팍한 이기주의로 자연을 훼손하려는 책동이었습니다. 건강한 시민단체 우이령보존회의 노력으로 그 계획을 무산시킨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또다시 우이령길을 자동차길로 만들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우이령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서는 적극 그러한 책동을 저지하는 데 힘을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이령, 우이령은 우리말로 하면 ‘쇠귀고개’입니다. 마치 쇠귀처럼 길게 늘여져 있다 해서 붙은 명칭이랍니다. ‘우이(牛耳)’는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이를 잡다’라는 말은 그래서 ‘어떤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다, 또는 자기 마음대로 일을 좌지우지하다’의 뜻입니다.
오늘, 우이령을 걸은 여러분들은 ‘우이를 잡은’ 정도를 넘어서서 ‘우이를 밟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후, 여러분들은 하시는 모든 일에서 뚜렷한 성취를 이룰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축하합니다.
(08.4.20. 우이령보존회에서 우이령길 걷기대회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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