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국내)

돌무덤 위에는 할미꽃이 피었더라

거북이3 2007. 4. 3. 13:48
돌무덤 위에는 할미꽃이 피었더라
이 웅 재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는다. 무슨 무덤이 저런가?
온전하게 한 바퀴 삥 돌아간 것이 원형이요, 그 원형은 생명을 상징한다. 해가 둥글고, 알이 둥글다. 원은 처음과 끝이 없다. 원은 영원을 지향한다. 그러나 성철 스님께서 그리셨던 원도 온전히 둥근 모습은 아니지 않았던가? 온전한 원은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다. 그래서 원은 변형한다.
원형을 반으로 자르면 반구, 반원이 된다. 반원형, 우리는 그것을 어디서 보았던가? 달리는 버스에서 시선이 머무는 곳,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포근하고 아늑한 곳에는 늘 그 반쪽짜리의 생명들이 누워 있었다. 그것은 생명을 쪼갠 것, 그것은 그러니까…,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던가? 장풍득수의 명당들에는 늘 그렇게 반원형의 죽음들이 누워 있는 것이다. 요즘 같은 봄날이면 파릇파릇 예쁘게 돋아나는 잔디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그 반원형들, 그래, 어쩌면 그것은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들일 것이다. 그래서 아늑하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얼핏 보아도 명당 터라고 하기에는 너무 외진 곳에 돌무덤 하나가 있었다. 좌청룡 우백호 따위를 따질 자리가 못되었다. 조산(祖山)이나 안산(案山)을 찾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입구라 할 수 있는 홍살문 앞에는 석사자상이 좌우에 각각 하나씩 서 있었고, 홍살문을 지나 직진하다가 상식을 깨뜨리며 90도 우회전하면 3개의 문이 달린 출입문이 하나 나타난다. 문에는 ‘들어가지 마시오.’라 붓글씨로 씌어 있는 흰 종이가 하나 붙었는데, 문은 정작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문을 조금 못 미쳐 안내판이 하나 서서 우리들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 상식을 무시하는 명칭이다. ‘傳’자는 사람들에 의하여 훼손되어 있기까지 하다. 고증은 안 되고 그저 구형왕릉으로 전해진다고 해서 ‘傳’자를 붙였다는 것이다. 구형왕, 가락국의 마지막 10대왕, 사서에는 구충왕(仇衝王), 구해왕(仇亥王)이라고 나오기도 하는 왕이다. 그 출입문을 들어서면 시커먼 돌무덤 하나가 보인다. 주위에도 울타리 격으로 돌담이 쌓여 있고 무덤은 7개의 기단이 점점 좁아지다가 그 위쪽에 놓여 있었다. 정면에서 보면 그것은 반원형의 무덤 모양이었지만, 그 뒤쪽으로 올라가 보니 위쪽은 평평한 타원형의 모습이었다. 그 근처에는 군데군데 아직 봉오리를 완전히 터뜨리지 못한 할미꽃 몇 송이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능 앞쪽에는 보기에도 후대에 만들어 놓은, 혼유석(魂遊石)이라기엔 격에 맞지 않는 상석(床石)이 하나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까만 오석의 비석이 하나 외로운 모습을 보였는데, 그 비석을 보는 순간, 아마 금년 최악의 황사 현상 때문이었을 것으로, 눈물이 찔끔 흐르는 듯싶었다. 비석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씌어 있었다. 신라 진흥왕이 쳐들어오자 중과부적, 사직을 지키려 모든 백성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는 없다 하여 나라를 바쳤고, 이에 진흥왕은 그를 양왕(讓王)으로 봉했다는 것이다. ‘나라를 양보한 왕’…그 얼마나 치욕적인 이름이었을 것이랴?
우리나라엔 원래 선양(禪讓)이라는 전통이 없었다. 그런데, 이 가락국의 구형왕이 처음 양위(讓位)를 했던 것이다. 아니, 이건 양위도 아니다. 말하자면 헌위(獻位)라는 말로나 표현할 수 있을까? 나라를 들어 바쳤던 것이다. 가락국이 신라에게 나라를 바쳤다. 당연히 그것은 하나의 전통이 되고 말았다. 바로 그처럼 나라를 헌납받았던 신라가, 그 신라의 경순왕이 또다시 나라를 들어 고려에게 바치지 않았던가?
상석 옆에는 장명등(長明燈)이 하나, 그리고 또 그 앞쪽 좌우에는 문인석, 무인석이 각각 하나씩 두 쌍이,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보이는 심약한 나그네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문무인석들도 기실은 구형왕의 처지가 안타깝게 느껴지고 있었던지, 잔뜩 울음을 참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일반인의 무덤도 아니고 왕릉이 이렇게 돌로 쌓여 있는 형태는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일이다. 그 ‘쌓여’ 있는 형태도 또한 상식을 무시한다. 기단이고 무덤이고 간에 규칙적으로 ‘쌓은’ 흔적은 전혀 없는 것이다. 돌의 크기도 제각각이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멩이들도 모두가 제멋대로였다. 한마디로 마구잡이식이었다. 나라를 보전하지 못한 왕이 어찌 흙무덤 속에 묻힐 수가 있겠느냐면서 돌무덤으로 묻어달라고 했다지만, 그걸 누가 증명해 줄 수가 있으랴?
어쩌면 나라를 들어 바친 치욕의 왕이라 하여 사람들이 던진 돌멩이들이 아무렇게나 쌓인 채 그대로 무덤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왕릉을 나오면서 왼쪽으로는 ‘흥무왕시릉사우지유허(興武王侍陵祠宇地遺墟)’라는 비석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구형왕은 흥무왕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조 때까지는 능의 주인공조차 모르고 지냈었다니, 역사무상이란 이런 것인가 싶었다. 정조 때 산청군 좌수 민경원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던가? 돌아가는 길에 지금은 왕림사(王林寺)라 하는 절에 들렀다가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 기록을 보고서 비로소 그곳이 구형왕의 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니, 어찌 세월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으리오? 돌무덤 위에는 할미꽃이 피어 있지 않았던가? 무상감을 나타내기에는 아주 적합한 꽃, 하필이면 그 할미꽃이 피어 있었던 것이다. 만개도 못 되는 반개한 모습으로 ….
척박한 산의 양달에서 잘 자라는 할미꽃은 설총의 ‘화왕계(花王戒)’에서는 백두옹(白頭翁)이라고 하여 화왕 모란에게 직간을 하는 신하로 나오지를 않았던가? 구형왕에게 무엇을 간언하고파서 그 등성이에 저처럼 피어난 것일까? 이른 봄, 꽃샘추위에 떠느라고 보송보송 털옷을 입고 있는 것인지, 옹송그리고 있는 모습이 바람이 불 적마다 한들거린다. 그래서일까? ‘바람의 딸’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다는 할미꽃이 가락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돌무덤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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