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국내)

문학마을 가는 길

거북이3 2006. 3. 24. 09:02
 

   문학마을 가는 길

                                          이   웅   재

   1. 출입금지의 경고문

 열한 명이 모였다.

 첫 번째 꽉 차는 숫자 열을 살짝 넘어선 것이다. ‘이음새 문학회’의 두 번째 산고(産苦)를 무사히 마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때르르릉….”

 “여보세요.”

 “저, 박준선데요.…”

 1박2일, 요란한 출판기념회 따위보다는, 회원들끼리의 1박2일 여행이나 떠나자는 것이었다.

 “술은 있겠지요?”

 “그럼요. 술 이야기를 연재까지 하신 분인데요.”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O․K! 그래서 모인 사람이 열한 명. 한 사람, 또 한 사람, 잇고 이어져 모인 이음새의 식구가 벌써 열 명을 넘어선 것이다. 실은 사정상 몇 사람이 빠진 상태이지만, 열한 명이란 숫자는 ‘이음새’의 전도(前途)를 나름대로 암시하고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8월 1일, 오후 4시경.

 미사리길은 언제나 막히는 모양이었다. 약속시간을 훨씬 넘기고 나서야 안내를 해 주겠다는 하남(河南)의 토박이(?)를 만날 수 있었다. ‘?’를 사용한 것은, 하남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하남에서 살고 있어, 처음과 끝은 ‘하남인’임에 틀림없지만, 그 가운데 부분이 조금 알쏭달쏭한 때문이다. 한 동안 미국이나 일본에서 지냈다고도 하고, 그러다가 고향이 그리워서 다시 찾아와 살고 있다는 자칭 ‘토박이’는 아닌 게 아니라 토박이다운 면이 의외로 강했다.

 그가 처음 우리를 안내한 곳은 ‘이성산성.’ 가끔 하남시 쪽에서 검단산이나 남양주 쪽의 운길산, 예봉산, 적갑산 등을 등반한 적은 있지만, 정작 이성산성을 답사한 적은 없었기에, 나로서는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었다. 하긴 시간상으로 보아 검단산은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가보는 이성산성이라서 특히 감회가 달랐나 보았다.

 풍납토성과 이성산성 쪽의 발굴단과 관련된 학맥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점들도 확연히 깨우칠 수 있었다. 풍납토성 쪽의 사료 가치가 더 높아 보이는 것은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에서 발굴한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남은 원래가 개발이 힘든 곳이다. 건물을 세우기 위해 삽질을 시작하면, 첫 삽질에서부터 고대의 역사(백제시대?)와 만나게 되어 쉽게 개발할 수 있는 곳이 못 되는 것이다. 첫 삽질에서 드러나는 깨어진 기와조각, 그래서 공사는 중단되고, 깨어진 기와조각들은 부랴부랴 그대로 묻혀 버리고 마는 곳이 하남인 것이다.

 문화재는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 땅, 또는 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혀서도 안 된다. 해결책은 충분한 보상비.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미봉책’만을 선호한다. 말하자면 ‘언 발에 오줌 누기’ 정책만을 내세운다는 말이다. 나중에야 오줌냄새가 나건말건, 예산타령을 앞세워 보상비는 쥐꼬리 중에서도 생쥐꼬리. 주민들만 골탕을 먹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것이나 따지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옛날 우물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셔보며 머릿속으로라도 백제인과 만나게 되었음을 행운이라 여겼다. 산은 밋밋했다. 등산이라기보다는 산책 코스인 셈인데, 날씨가 더워서일까, 의외로 중간에서 만난  등산객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조금 오르다 보니 상당히 넓은 대(臺)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곳은 옛 역사가 숨 쉬는 곳, 여기저기 건물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주춧돌이 보이고, 한쪽으로는 금줄을 쳐 놓았다. 그 금줄에 붙여놓은 경고문, ‘출입금지’가 있기에, 들어가 볼 수 없는 불만스런 마음에 농담 한 마디를 던졌다.

 “지금 들어갔다가() 나오라는군().”

 ‘출입금지’를 거꾸로 읽어본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문화시민이 어찌 금줄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하산하니, 저녁 먹을 시간, 배가 고파오기 시작한다.


 2. 미사리의 ‘발렌타인’

 ‘하남 토박이’는 우리를 남한산성 아래쪽의 쌀밥집 ‘복가’로 안내했다. 친구가 영업하는 집이란다. 상호에는 ‘福家’라는 한자어를 명기했는데, 정말 잘한 일이었다. 한글로만 썼을 경우, 자칫하면 ‘복 가(아)’가 될 수도 있어 복이 달아나 버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한자 사용의 당위성이 이런 음식점에서도 찾아지는 일이었다.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뜰에는 수국(水菊)이 만발했고, 한쪽으로는 감나무가 무성한 잎을 자랑하고 있어, 정말로 ‘복가(福家)’다운 풍모였다.

 배를 채우고 나니 이제는 ‘금강산 구경’이 남은 셈인데, 세 사람은 몽매에도 잊을 수 없는 가족들에게로 돌아갔고, 나머지(이건 나머지가 아닌데…. 굳이 말하자면 ‘남은 사람?’, 그러나 그것도 거의 비슷한 느낌이잖은가?) 8명이 ‘금강산'으로 택한 곳은 미사리의 ‘발렌타인’. ‘12년 산’을 집에 둔 지 3년 지났으니 ‘15년 산’이라고들 하는 ‘술’이 아니고, 라이브 음악을 공연하는 카페였다.

 메뉴판에는 스크류 드라이버, 진 토닉, 파인주스, 오렌지주스… 따위가 적혀 있었는데, 허억! 이게 모두 3만 원씩이라는 거다. 무식하기는…그게 어디 주스 값만인가? 인기 가수들이 나와 재담과 노래로 걸쭉하게 한판 벌이는데, 평소에 음악회 따위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모양이지?

 ‘스크류 드라이버’를 주문했다. 주스는 분위기 값으로는 너무 밍밍한 것 같고, 진 토닉은 흔히 대할 수 있는 것이라서, 내게는 조금 생소한 이름의 스크류 드라이버를 택했던 것인데, 기대에 찬 첫 대면에서 ‘스드’씨는 의외로 소월의 ‘초혼’에 나오는 ‘산산이 부서진 이름’으로 나를 맞는다. 차라리 진 토닉을 주문할 걸, 하고 후회도 해 보았으나 이미 버스 떠난 뒤 손들기요, 죽은 아들 ×× 만지기였다. 대신 촌스러움이나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서 천천히, 기막힌 맛이나 음미하듯이 아주 천천히‘스드’씨를 공략하였다.

 ‘스드’씨와도 거의 아듀를 고할 때쯤 되어 드디어 입구에서부터 “아름다운 꽃송이…”하는 귀에 익은 노랫말이 들려오더니, ‘아!(다른 사람들의 감탄사)’ 인순이가 등장하는 것이었다. 검은 바지에 흰 블라우스, 곱슬머리에 귀에는 큼지막한 링을 단 모습이었다.

 누가 6․25세대(62세까지 직장에 다니는 ×은 5적이라나)가 아니랄까봐 나는 주렁주렁 액세서리를 달고 있는 모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농경민이었다. 농경민에겐 ‘땅’이 최고의 가치 지향점이다. 반대로 유목민의 경우에는 자연환경에 따라 언제라도 생활 근거지를 옮겨야 하기 때문에, 모든 재산을 몸에 지니고 있어야 되기에 액세서리가 발달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런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미개인일수록 귀걸이는 물론, 코걸이, 혀걸이를 비롯하여 별난 데까지도 링을 하는 습성들이 있지 않던가?

 하지만, 인순이의 링은 별 거부감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연예인이란 점을 염두에 두어서일까?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중이라도 내가 인순이를 끔찍이 좋아하는 때문일까?


3. 엉뚱한 주례사

 그러나 그런 것을 차분하게 생각해볼 틈이 없었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새로 울려 퍼지는 노랫말이 내 가슴을 흔들어놓고 있었다. 인순이도 이 부분부터 몸을 흔들고 머리를 휘돌리기 시작했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젊었을 적 그런 생각 한 번쯤은 가졌어야 되었을 것인데, 내겐 도통 그런 기억이 없다. 누굴 못 견디게 그리워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아니, 연애감정에 얽매인다는 것은 ‘감정의 사치’라고나 여겼다고 할까? 어쩌다 좋아하고픈 사람이 있어도 나는 그 감정을 억제하곤 했다. 6․25라는 괴물 때문에 맞닥뜨린 끊임없는 가난의 벽, 나는 ‘전쟁’이 내 삶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앗아갔다고 치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님은 먼 곳에….” 가 버렸고, “망설이다가…” 남은 건 ‘후회’뿐이었다.

 인순이가 말했다.

 “노영심이란 친구가 선물로 준 노래인데요, 제목은 ‘최면’이랍니다….”

 블라우스를 묶어 배꼽을 드러내면서 열창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 그려진 ‘내 천(川)자’의 골을 타고 노랫소리는 물 흐르듯 흘러간다. 남아있던 스크류 드라이버를 홀짝 마시면서 그 음률 속으로 따라가 보니, 노래 제목 그대로 ‘최면’에 걸렸다고나 할까? 잠시 몽롱해진 것은 술기운 때문일까? 노랫소리 때문일까?

 “저는 탱고를 좋아하거든요. 분위기를 바꿔 드리지요.”

 묶어 올렸던 블라우스가 풀렸다.

 “제가 주례를 두 번 서 봤는데요….”

 이야기가 이어진다. 주례사 대신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하객들은 박수로 화답했고. 우렛소리를 능가하는 박수소리 속에 진행되었을 결혼식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나는, ‘그래, 그거야.’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박수’란 ‘축하’의 의미일 텐데, 식장 가득 메운 박수소리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면, 그 얼마나 축복받은 예식이었을까?

 나도 몇 번의 주례를 서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잘 살아라.’ 하는 넉 자로서 충분한 얘기를 이렇게저렇게 늘어놓다 보면 하객들은 참아왔던 하품들을 노골적으로 터뜨리지들 않던가? 그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는 주례사를 해야 하는 주례는 괴롭기가 그지없는 일인데, 노래, 노래로 하는 주례사는 얼마나 신나는 일이랴?

 하지만, 난 금방 주눅이 들었다. ‘노래방에만 가면 주눅 드는 남자’라는 글까지 쓴 사람이 주례사를 노래로 한다는 건 더더구나 주눅이 드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노래로 하는 주례사는 인순이가 도맡아 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인순이의 노래는 또다시 바뀌었다.

 “앞집의 처녀는 시집을 가는데,

 뒷집의 총각은 목매러 간다.”

 바보 같은 놈. 사랑한다고 말이라도 해 볼 것이지. 목을 맬 수 있는 용기라면 무슨 일을 못 하느냔 말이다. 남자 망신 혼자 다 시키는 놈. 그러는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뒷집의 총각과 동격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누가 조르기라도 하는 듯 목이 답답해져 온다.


4. 체리 보이와 바니걸스

 11:20.

 가수가 바뀌었다.

 “시방부터 열심히 까불겠습니다.”

 백바지에 빨간 T. 체리 보이였다.

 “얼굴을 보니 오래 묵었습니다.” 제가 제 촌평을 한다. 정말로 늙었다. 그러나, 화장 덕분인지 아직은 젊어 보이기도 했다. 늙어 보이면서도 젊어 보이는 사람, 그것이 체리 보이였다. 하긴 이름 자체에 ‘보이’가 들어 있으니, 영원히 늙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늙지 않는 일,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좋을까? 아니, 아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일, 그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

 “그래 봐도 인순이보다 15년 유통기간이 남았습니다.”

 그는 늙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게 누구 발이게?”

 앞자리에 앉은 여자 손님에게 물었다.

 “성함이 뭐지요?”

 여자의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아, 지미 씨요?”

 하더니, 그 여인의 발을 가리킨다.

 “이게 누구 발이게? (조금 사이를 두고) 지미 씨발.”

 사람들이 웃는다.

 “나, 욕 안 했습니다.”

 하면서 열심히 주워섬기는데, 얼굴은 온통 땀투성이다. 인순이는 땀이 나질 않았었다.

 “이게 땀인 줄 아세요? 이거, 육숩니다, 육수.”

 말과 함께 손으로 쓰윽 문지른 다음,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가 맛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는 물 한 모금을 마신다.

 “노래―만담―땀―물”이 뒤범벅이었다.

 “여긴 인순이, 최진희, 편승엽, 바니걸스, 방실이가 이틀씩 교대로 나옵니다. 그런데, 나는 매일 저녁 출연합니다. 왜? (조금 사이를 두고) 싸니까.”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나이와 땀투성이의 모습에서 연민과 동정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건 바로 그의 의도인 듯이 보였다.

 다음은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와 더불어 ‘바니걸스’가 등장했다. 평소에는 무척 갈비로 여겼는데, 실물은 예상과는 달리 갈비로 보이지를 않는다. 붉은 색 원피스에 뒤로 묶은 머리였다.

 “우리 토끼소녀의 토끼와의 공통점은 뻐덩니거든요. 요새 갈갈이처럼요.

 동생은 집안 형편상 음악 활동을 접었거든요….

 옛날에는 깜찍하고 귀엽고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는데, 지금은 막걸리, 동동주, 된장찌개 같거든요.”

 한 쪽 소매는 손목까지 내려왔는데, 다른 한 쪽은 민소매였다. 그녀는 ‘~거든요’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했다. 바니에게서는 화술(話術)보다 노래 쪽이 듣기 좋았다. 준서 씨는 가끔 그녀의 노래를 허밍으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5. 옛날 찜질방

 12:30. 바니의 쇼는 계속되었지만, 시간도 어지간히 흘렀고, 게다가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고 해서 그곳에서 나와 하남 변두리의 허름한 ‘옛날 찜질방’으로 향했다. 말하자면 그곳이 오늘의 숙소인 셈이었는데, 이름마따나 정말 ‘옛날 찜질방’이었다. 예의 하남 토박이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찜질방을 알아 봤더니 공교롭게도 한 곳은 8월 2일까지 내부 수리중이고, 한 곳은 또 8월 1일부터 내부 수리로 들어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 ‘옛날 찜질방’을 예약했다는 것이다.

 허름한 건물, 옛날 건물다운, 약간은 퀴퀴한 냄새까지 나는 곳이었는데, 찜질방이라고는 난생 처음 구경하는 처지이기에 요즈음 현대적 찜질방과 비교해 볼 수가 없음이 아쉬웠다. 남녀 탈의실은 의좋게 옆으로 붙어 있었다. 청실은 여자용, 홍실은 남자용,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서로 뒤바뀐 것 같은데, 나중에 보니까 그건 순전히 의도적이었던 듯하다. 이 집은 단지 ‘옛날’로서만 특이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난 것이 많았던 것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곳에는 ‘講道如山 政事如水’라 쓴 글귀도 보였다. ‘講道’는 그렇다 치고라도 ‘政事’를 보니, 이 집 주인, 정치 쪽을 기웃거리는 취향을 알 듯도 싶었다. 샤워실 옆쪽에는 체중계가 있었는데 내 몸무게는 제대로 계측해 주었지만, 준서 씨는 여러 번 재어 보아도 계속 35kg밖에 나오질 않았다. 아직도 청소년 티를 못 벗어서 그런가? 한마디로 엉터리라는 얘긴데, 그런데도 이 집 손님은 의외로 많았다. 그건 아마도 ‘옛날’에 대한 선호도 때문일 듯했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찜질방들이 내부 수리 중이었다는 안내자의 말을 들으면, 어쩔 수 없어서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도 꽤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어쨌든 ‘옛날’의 맛은 느껴지는 듯싶었다. 지하에 있는 진짜 ‘찜질방’은 사면이 흙벽이어서 물씬 흙냄새가 풍겼고, 10평 남짓한 북찜질방에는 희미한 등 3개가 걸려 있을 뿐이라서 무척이나 어두침침하였다. 천장은 허리를 마음 놓고 펼 수 없을 정도로 낮았고, 가운데로는 물을 순환하게 하려는 것인지 겉으로 노출되어 있는 플라스틱 관이 있었고, 중간에는 아마도 쓰레기통 대용인 듯한 커다란 깡통이 놓여 있었다.

 쑥찜방은 15평쯤 될까? 바닥은 멍석이었고 낡은 형광등 불빛이 비출까말까 고민 중인 듯 희미하게 껌뻑거리고 있었고, 목침 네댓 개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1층의 홀로 나오려면 머리를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서 ‘기어’ 나와야 했고, 홀의 한쪽에는 2001년 8월 15일 단성사 개봉작이라 쓰인 영화 포스터 하나가 붙어 있었다. 권일수 감독의 ‘고추 불패’, 제작․주인공 장바우. 그런 영화도 있었었나? 종업원들의 말에 의하면, 이 집 주인이 출연했던 영화란다. 그는 이와 비슷한 몇 작품에 출연을 했었고, 나중에는 정치판도 기웃대었던 모양이었다.

 한쪽에는 양 끝에 나무 받침대로 받쳐 놓은, 눈까지 새겨 넣은, 비교적 거대한 ‘고추’ 목상(木像)이 느긋하고 당당하게 누워 있었고, 그 옆쪽으로는 도자기 몇 점, T․V, 옹이가 많은 가지에 니스 칠을 한 나무, 음료수 판매용 냉장고 등이 나름대로 제자리를 찾아 놓여 있었다. 중앙으로는 오래된 어항이 하나, 그 옆으로는 식수대, 마룻바닥에는 탁자 몇 개와 이미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장식용으로 전락한 에어컨 한 대, 그리고 그 에어컨을 대신해서 힘겨운 모습으로 덜컥덜컥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 하나가 외롭게 보였다.

 그래도 ‘찜질방’에 들어갔다 나와서인지 우리 팀원들의 얼굴은 모두가 뽀얗게 보였고, 누군가가 옛날 찜질방답게 썰렁한 농담 한 마디를 했다.

 “남편들이 밤낮 외박하고 오라고 할지도 몰라.”

 그 야무진 꿈을 축하(?)하기 위해 준서 씨와 나는 맥주 1캔씩을 마시고 지하 ‘찜질방’으로 내려가는 곳 옆에 있는, 수면을 위한 방 ‘난실’에 들어가 밤새 더위와 악전고투하면서 1박을 했다.


6. 고추와 불패

 이튿날 8:00 기상.

 앞마당으로 나가려니 문이란 문은 모두가 삐걱삐걱 비명을 지른다. 말하자면 그것도 ‘옛날’을 증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마당엔 흰 개가 두 마리, 그 이름은 ‘고추’와 ‘불패’란다. 가는 곳마다 ‘고추’의 ‘불패’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집 주인의 ‘고추’는 정녕 ‘불패’인 모양이었다. 아니다. 그건 언어의 그 미묘한 감각적 용법에 무지한 때문에 강조되고 있는 표현일 뿐이리라. ‘고추’는 원래가 ‘매운 놈’이요, ‘빳빳한 놈’이거늘, 굳이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실상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임에 틀림이 없다.

 ‘고추’와 ‘불패’. 놈들은 꼬리치며 움직이는 일을 경박하게 여겼던지 좀체 꿈쩍대질 않는다. 이럴 땐 놈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고추야!”

 “불패야!”

 “제 이름을 불러주는데도 꼼짝 않는 놈은 보신탕집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대원칙을 이놈들도 알고 있었는지, 놈들, 느릿느릿 기지개를 켜면서 꼬리를 설설 움직인다.

 바깥채 쪽으로는 등나무와 능소화가 서로 의지하며 담벼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능소화는 2~3송이의 꽃을 화알짝 피우고 있었으며, 금방이라도 피어날 듯한 봉오리도 3~4개 눈에 띄었다.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우리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각자 짐 정리들을 했는데, 그럴 수가? 머리 손질을 하기 위하여 드라이기를 집어 들었지만, ‘옛날 찜질방’의 이름에 걸맞게 전혀 작동이 되질 않았다.

 어제 밤중엔 너무 늦게 찾아오느라 몰랐지만, 밖으로 나와 보니 초가 대문에, 안채도 슬레이트 위에 또 초가를 올린 형태의 집이었고, 울타리 쪽에는 역시 능소화, 등나무, 봉숭아 들이 다소곳이 우리들을 반기고 있었다. ‘찜질방’이란 간판 옆에는 장작 아궁이가 있었고, 이 아궁이는 강원도에서 가져온 장작만으로 쑥찜질방에다 불을 넣는 곳이란다. 불을 붙이기 위한 성냥도 ‘옛날 찜질방’답게 요즘에는 볼 수 없는 두부모만 하게 큼직한 8각성냥이었다.

 중로의 남종업원(?)은 아침부터 파리채를 들고 전심전력으로 파리를 잡고 있었지만, 웬걸? 그 ‘옛날’을 비웃듯 파리들은 용케도 피해 다라나 버려서, 그로 하여금 연신 ‘아이쿠!’를 내뱉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질 않고 계속 파리를 주춤주춤 따라다니고 있었다. T․V도 분위기를 맞춰 ‘치지지직…’ 소리를 내며, ‘옛날’의 이미지에 일조하고 있었다.

 ‘옛날’은 도처에 있었다. 여자분들이 잔 방에는 밤중에 비까지 샌 모양. 우리 최찬희 씨는 밤중에, 그 새는 빗물 때문에 그만 꽈당! 넘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7. 연엽주 생각이 간절했지만…

 ‘옛날 찜질방’을 나와 문학마을엘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양주에 있는 서울종합촬영소엘 들러, 취화선, JSA 세트 구경 및 조선시대 후기 서울․경기 지방의 사대부 가옥을 옮겨 복원한 운당(雲堂)을 관람했던 일은 수련(垂蓮)에 관한 몇 마디 설명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수련은 대부분 항아리에 담겨 있다. 집에 연못을 갖출 처지가 못 되는 가난한 선비들이 연꽃이나 수련을 즐기기 위해서는 옹기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옹기항아리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수련들, 그 옛날 가난한 선비들을 위해 그들은 최대로 자신의 향기를 내뿜었을 것이다.

 단아한 자태의 수련은 오전 8시쯤 꽃잎을 열었다가 하루 중 햇살이 가장 강한 오후 2시쯤이면 잎을 닫고 잠을 잔단다. 그래서 ‘睡蓮’이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수련, 그 이름에서부터 사랑이 묻어난다. 연잎에 찹쌀․녹두․연자육(蓮子肉:연의 씨) 등을 넣고 쪄서 만든 연반(蓮飯)은, 연잎의 은은한 향이 배어 있어 별미의 음식이란다.

 그보다도 이곳에서는 연잎을 이용해 만든 연엽주(蓮葉酒)를 맛볼 수도 있다고 하는데, 우리의 이음새님들, 피곤하다며 금방 이곳을 떠나고 있었다. 오호 통재(痛哉)라! 그래서 내 술배는 ‘고픈 채로’ 이번 여행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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