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미골 막사발
이 웅 재
서른셋.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 3이 두 번이나 반복된 숫자. 그 숫자에는 축복이 찾아와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축복도 곱빼기 축복이….
그런데, 그 서른셋에 한 여인은 천하를 잃었다. 남편을 잃은 것이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이름도 귀한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국문과를 나온 여인 장금정(張今貞). 결혼한 지 6년, 곱게곱게 자랐던 그녀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남 몰래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곳은 부엌. 부엌을 자주 드나들던 그녀는 이리저리 뒹구는 막사발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 없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자신도 어쩌면 막사발과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막사발이 되어 보았다. 막사발이 비로소 새롭게 태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막사발은 대범했다. 누가 어떻게 대해 주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었다. 그 모양 자체가 청자나 백자처럼 날씬한 몸매가 아니었다. 투박스럽기 그지없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아가리가 벌어져, 그 어떤 음식이라도 담아내겠다는 겸손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차츰 막사발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 ‘그래, 막사발은 이 세상 무엇이라도 반갑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는 이미 “내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그런데 막사발에 관심을 갖고 알아보기 시작하니, 막사발은 막사발이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 막사발이 아니었다. 막사발은 숨을 쉬고 있었다. 막사발은 살아 있었다. 그래서 거기 담기는 음식은 살아있는 맛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막사발은 또한 막사발이었다. 그건 무엇보다도 우리 서민들과 늘 함께 생활한 그릇이었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그 막사발을 밥그릇, 국그릇으로 쓰다가 귀 빠지면 개밥그릇으로도 사용했던 것이다.
그녀는 막사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사발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가 끊겨 생산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마구 굴리던 막사발인데 찾아보기가 힘들다니…. 그녀는 문헌을 뒤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 전쟁은 ‘야키모도 센소(陶磁器 戰爭)’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다도(茶道)의 사치가 한창이었다. 다회(茶會) 자리에는 호랑이 가죽이 깔리고 중국의 청자 잔이 등장하고….이러한 귀족 취향의 다도에 반발해 서민의 차, 검소의 차, ‘와비 차’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서 찻잔에서도 꾸밈없는 서민적인 찻잔, 조선의 막사발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작위, 무기교, 무수식의 막사발을 강탈해 갔고, 막사발 도공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 끌려가지 못한 도공들, 그들은 모조리 죽임들 당했다. 조선 막사발의 맥을 끊기 위한 의도였다. 그들이 약탈해간 막사발 중의 하나가 지금 일본 1급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키자에몬 이도(喜左衛門 井戶)로 지금도 교토의 다이토쿠지사(大德寺) 코호이안(孤蓬庵)에 보관되어 있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개밥그릇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이 그릇은 이미 당시에 황금 3천금 값인 550만 냥에 팔렸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성(城) 한 채와 맞바꾸어지기까지 했단다.
그녀는 하동군 진교면 백련리 새미골(璽美골, 또는 샘골)에서 옛 가마터를 발굴하여 복원하고,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죽임을 당했던 무명 도공들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무명도공추념비까지도 세워 주었다. 집 주변에는 감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차나무, 동백나무 등을 심고 앞쪽의 너른 논에는 흰 연꽃[白蓮]을 심어 백련리라는 옛 마을 이름을 되찾게 하기도 하면서 막사발의 옛 파편들을 찾아내어 그 조각을 스승 삼아 만들고 또 만들었다. 집을 8채나 팔아먹으면서까지 끈질긴 노력 끝에 옛날의 막사발을 재현해냈고, 이제는 마을 절반가량의 땅을 사 들일 정도로 성공을 하였다.
그녀가 만든 너구리 가마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마로, 영화인들의 눈에 띄어 조선시대 화가 장승업을 그린 영화 “취화선”의 마지막 장면, 장승업(최민식 분)이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바로 이 새미골 가마에서 촬영되었다. 그 후 영화 “단적비연수”, 드라마 “다모”, “대장금”, “상도” 등에도 이 새미골 가마와 막사발이 등장하여 일반인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제5회 토지문학제에 참가했던 수필문학사 일행은 그 이튿날인 10월 9일 한글날에 이 새미골 가마를 찾아, 장금정 여사의 정성 어린 점심을 대접받으면서 가슴 속 이 찌릿찌릿하는 감동을 느꼈다. 음식들은 모두가 장여사가 손수 만든 막사발을 비롯한 여러 가지 그릇에 담겨 있었고, 그래서 음식은 살아 있었다. 그건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독특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특별히 준비해준 술은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우리 모두는 장여사가 계속 날라다주고 덜어주는 반찬을 대하면서 우리는 오랜만에 예전 할머니의 마음,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맛을 느껴 보았다.
그 정성에 보답하는 의미로, 일행 중 어느 한 사람이, 아, 알 만한 동양화가가 전면 벽에 백지 상태로 붙여져 있던 화선지에 매화 그림을 그렸고,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서명을 했다. 그래, 이 경우 ‘어느 한 사람’이란 표현이 적절할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래야만 무명도공들의 막사발에 대한 예의가 될 터수가 아닐까? 그런데, 이런 경우, 꼭 한두 사람이 제 이름을 두드러지게 하게 위해 약간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도 있게 마련, 그러나 우리 모두는 정말 즐겁게, 그리고 맛있게 점심을 먹고, 연꽃 우거진 호수를 지나 ‘금정기념관’을 비롯한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나는 원래가 음악이나 미술 쪽으로는 전혀 문외한이지만, 앞으로 막사발에 대해서만은 내 미적 감각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본다. 이 모두는 장금정 여사의 친절과 이곳을 찾을 수 있게 수고를 해준 내 젊은 친구 박준서 씨의 호의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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