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 캐나다 문화 체험기

(미국 ․ 캐나다 문화 체험기 53) ‘사악한 강’과 ‘사라지는 호수’

거북이3 2012. 4. 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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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캐나다 문화 체험기 53)

     ‘사악한 강’과 ‘사라지는 호수’

                                                                                                                                                                                                 이 웅 재

 

4월 20일(수). 맑음.

어제 Columbia Icefield에 가서 만년설을 밟아보기도 한 데다가 비교적 장거리를 이동한 까닭에 오늘은 뜸까지 푹 들이는 늦잠을 자고 10:20쯤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Hotel을 나와서 멀린 강(Maligne River)을 따라 난 동남쪽 국도로 접어들었다. 도로명도 Maligne Road였다. 길 양편으로는 눈이 녹아 군데군데 초원이 나타나는데 왼쪽 초원에 开 비슷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곳에 사슴 4마리가 여유롭게 출을 뜯어먹고 있는 것이 보여 잠시 차를 멈추고 그들의 행동을 구경하였다. ‘开’은 ‘Do not disturb(방해하지 마시오)’의 의미라는데 재스퍼 쪽에는 이런 표지가 많았다. 그들의 안내책자를 보면 재스퍼 국립공원 고속도로 상에서만도 매년 평균 130여 마리의 대형 동물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고 한다. 웬만한 곳에 가면 한글로 된 안내서들도 더러 구할 수가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조금 더 가노라니 Maligne Canyon이 나타난다. 이쪽 지명에는 이 Maligne이라는 말이 많이 들어가는 것을 보니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인 것 같다. 그 앞쪽 산은 2,465m의 휘슬러(Whistler)이고 오른쪽은 그보다도 더 높은 2,763m의 Pyramid 산이다. Whistler 산은 원래 Mt. London이었는데 이 산에서 살고 있는 Marmot(다람쥣과의 설치동물)이 휘파람 소리와 비슷한 울음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참 더 남쪽의 Maligne Lake에서 흘러나온 물이 Maligne River를 이루고, 다시 Medicine Lake를 거쳐 Athabasca River로 흘러가는데, 이 계곡에 이르러 거센 급류로 변하여 주위의 석회암 바위들을 깎아서 만들어낸 협곡이 바로 Maligne Canyon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 계곡을 ‘작은 그랜드 캐년’이라고 한다. 높이는 50m,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겨울철이라 물이 많지 않고 얼어 있어서 계곡 밑으로 내려가서 볼 수도 있다. 계곡 위쪽의 눈이 녹아서 계곡으로 흘러내리면서 얼어버린 고드름이 환상적인 경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협곡의 멋진 절경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산책로도 있고, 지금은 얼어붙었지만 군데군데에 있는 크고 작은 폭포들도 빠뜨릴 수 없는 볼거리이다.

그런데 그 이름이 특이하다. Maligne이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사악(邪惡)한’이라는 뜻이란다. 그런 데에는 다 까닭이 있다. 1846년 벨기에 출신 사제(司祭) Father de Smet가 Athabasca로 오느라고 강을 건너다가 빠져 죽을 뻔할 정도로 무척 힘들게 건넌 곳이라고 해서 ‘사악한 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우리의 연암(燕巖) 선생이 『열하일기』 중 「산장잡기(山莊雜記)」「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처럼 “마음을 잠잠하게 하는 자는 귀와 눈이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아져서 큰 병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굼실거리고 으르렁거리는 물결”도 다 ‘외물(外物)’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고 ‘현혹되지 않는 삶의 자세’를 굳건히 지킬 수 있어서 ‘사악한 강’이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터인데, 한 수 아래인 Smet 사제는 그만 그걸 몰랐던 것이다. 딴은 그에게 있어서는 피를 ‘말린’ 강이었지 싶기도 하여 더 이상 탓하지 않기로 했다.

전망대 근처에는 ‘산양의 똥(?)’이 군데군데 널려져 있었다. Medicine Lake로 가는 길로 접어드니 오른쪽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곰의 발자국인 듯 제법 큰 짐승의 발자국도 어지럽게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계곡을 따라 계속 이동하노라니 절벽까지도 황토색이 아니고 바위 빛깔 때문인지 회색으로 보였다. 그 앞쪽의 Medicine 호수는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로 한 줄기 녹은 물만이 찔찔대고 흐르고 있었다. 메디신 호수는 ‘사라지는 호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여름에는 여기저기서 흘러드는 물이 많아서 호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10월 이후가 되면 호수가 사라지는 것이다. 유입되는 수량은 점점 줄어드는데다가 호수 밑에 있는 많은 석회석 동굴로 물이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치유의 호수(Medicine Lake)’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앞쪽 산의 바위는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 그것도 원주민의 모습을 꼭 빼닮았다. 그런데 이곳을 빼앗겼다고 성내는 모습이 아니라서 의아스러웠으나 성내는 모습보다도 더욱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는 것은 그 모습이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지금이라도 당장 뒤돌아서서 더욱 깊은 산속으로 걸음을 떼어놓을 듯싶은 표정을 보며 내가 울컥 목이 메었다. 물속에서는 새끼 새들이 호수를 끼고 U자형으로 돌면서 서로 쫓고 쫓기고 있었고, 눈 덮인 얼음 위에서는 어미 새가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호수를 끼고 차는 달린다. 오른편으로 길게 이어지는 Maligne River의 강물 줄기가 길게 이어진다. “구름 흘러가는/ 물결은 칠백 리(七百里)”라는 조지훈(趙芝薰)의 「완화삼(玩花衫)」 한 구절이 저절로 떠오른다. 호수 오른쪽으로 뿔은 둥글게 꼬여 있고 궁둥이는 하얀 산양 한 마리가 강 언덕에서 풀을 뜯고 있어서 바로 그 곁에 차를 세우고 보고 있어도 도망도 가지 않는다. 산양만 그런 게 아니다. 다시 차를 출발시켜 달리는 중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아 깜짝 놀랐더니 예쁘장하게 생긴 새 서너 마리가 앞 유리창에 부딪칠 듯하며 날아간다. 너무 많이 먹어 몸이 무거웠나? 새도 눈빛을 닮아 새하얗다.

차는 달리고, 고도는 차츰 높아져 이제는 길가에도 풀밭이 보이질 않고 흰 눈만 수북이 쌓여 있다. 찻길 오른쪽으로는 계곡물이 계속 따라 흐르는데, 물 옆으로는 얼음 위에 눈이 쌓여 있어 그 물이 계곡물에 반사되어 물빛은 완전히 에메랄드빛을 띠며 반짝반짝 빛난다.

서영이가 기분이 좋은지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말한다.

“가사를 까 먹었어.”

“그 노래는 껍질도 있는 모양이네. 까서 먹게.”

썰렁한 유머 한 마디를 하는데, 차가 드디어 Maligne Lake에 닿았다. 재스퍼를 대표하는 관광지이다. (2012.4.2. 원고지 1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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