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 캐나다 문화 체험기 54. Maligne Lake에.hwp
(미국 ․ 캐나다 문화 체험기 54)
Maligne Lake에서 느껴보는 순수 비애
이 웅 재
머린 호수에는 아무도 없었다. 상점이나 숙박업소 등은 몇 개 있었지만 상점 주인들도 없었고 우리 이외에는 관광객도 없었다. ‘사악한’ 곳이라서 그럴까? 그러나 경관(景觀)은 끝내주었다. 먼저 통나무로 지은 Maligne Inn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고 그 외벽에 붙여놓은 사진을 보니 호수 속에 매우 아름답고 멋진 섬이 하나 있었다. 저곳은 배를 타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 곳, 아무도 없는 곳이다 보니 뱃사공도 있을 리 없다. 그저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갔다 온 기분을 내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Maligne Inn을 지나 호수 쪽으로 가는 곳으로는 나무 계단이 있었고 그 나무계단을 지나서 발자국 몇 개가 나 있기에 그것을 따라 들어가 보았으나, 조금 더 들어가니 그 다음부터는 발자국도 없고 그냥 눈만 쌓여 있었다. 서영이가 그 눈 위를 밟고 지나가는데 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고 어른들도 따라 들어갔더니, 웬걸, 이제까지 멀쩡하던 눈이 어른의 무게까지는 감당하지 않겠다고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무릎까지 빠지는 어른들을 보고 서영이는 좋아 죽겠단다.
“곰도 여기 빠져 움직이지 못했으면 좋겠다. 옆에 가서 구경도 하게.”
서영이가 들으라고 한 마디 던졌더니, 돌아오는 말.
“그래두 입은 안 빠지잖아?”
눈 속에 빠졌던 어른들이 간신히 빠져나오자 아이들은 그 자리를 디디고 왔다갔다 하다 보니까 신발이 얼어붙어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고 아이들은 아예 양말까지 젖어버려서 새 양말로 갈아신기까지 했다.
여름이었다면 정말로 멋진 풍경이었을 것이다. 다른 호수들과는 달리 호숫가에서 멀어질수록 호수의 색이 조금씩 조금씩 변해 간다고 하니 말이다. 처음에는 청록의 터키석 같던 물빛이 차츰 에메랄드빛처럼 바뀌어 간다고 하여 멀린 호수는 ‘로키의 보석’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호숫가에는 시원스레 쭉쭉 뻗은 상록의 나무들, 호수 가장자리 얕은 곳에는 언제 죽었는지 도 알 수 없는 죽은 나무들이, 오랜 세월 동안 아무렇게나 버려져 껍질마저 벗겨진 채 비바람에 시달려서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파사(婆娑)한 모습의 나무뿌리와 둥치들이 우리로 하여금 눈길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찌뿌드드하던 날씨가 드디어 퍼얼펄 함박눈을 내리기 시작했다. 에메랄드빛의 호수 물은 보지 못했어도 눈 내리는 호숫가는 나름대로 낭만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럴 때 이런 곳에서 따끈한 매운탕에다가 쐬주 한 잔 걸치면 정말로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텐데…매운탕도 없고 쐬주도 없고 우리 말고는 다른 사람도 없다 보니 약간은 서글픈 느낌까지 든다. 하기야 가장 순순한 감정은 ‘비애’라고 하지 않았던가? 없어서 슬프고 외로워서 슬프고 순백의 풍경이 슬프고 저 호수 가운데 있는 섬까지 갈 수가 없어서 슬프고, 다시는 와 보기 힘들다는 생각에서 슬프고, 아, 발이 시려서 슬프다.
내리던 눈이 그치고 금방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서 슬픈 감정이 사그라들기 시작하기에 호수를 혼자 남겨두고 차를 되돌리어 재스퍼 쪽으로 출발시켰는데, 이번에는 호수가 우리와의 이별이 슬퍼서 하늘을 향하여 축원이라도 한 것일까? 금방 또 눈발이 희뜩희뜩 내리더니 순식간에 사방이 뽀오얗게 변한다. 그런데 변덕도 그런 변덕이 없다. 다시 금세 '햇볕은 쨍쨍'으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쨍쨍 내리쬐는 햇볕 속에서 퍼엉 펑 눈이 내리는 것이다. 햇볕이 나 있는 날 잠깐 오다가 그치는 비는 ‘여우비’라고 하는데, 이것은 ‘여우눈’인가? 그러나 ‘여우눈’이라는 말은 없다. 내리던 눈도 ‘여우눈’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을 뒤미처 알아챘는지 금방 눈이 그친다.
국도에는 인적이 없다. 자동차도 어쩌다 한 대씩 지나간다. 시내만 벗어나면 재스퍼는 오로지 우리의 것인 듯싶다. 이 천연 그대로의 설경이 몽땅 우리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풍성해지는 느낌이다. 거기에 다시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오른쪽 길가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사슴 두 마리, 궁둥이가 하얗다. 근처에 두 마리가 또 보인다. 아마도 요 근처에서들 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잠시 사파리(safari)를 탐험하듯 숲속 길로 들어가 보니 자그마한 현수교(懸垂橋)가 있는데 그 근처는 약간 넓은 공지(空地)였다. 서영이가 놀란다.
“어, 돌고래도 있네!”
돌고래? 아니, 이 깊은 산 중에 무슨 돌고래가 있다는 말이지? 그러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앞산이 돌고래 모양이었던 것이다. 다시 눈이 퍼얼펄 날린다. 돌아서 나오니 아까의 그 사슴님들, 그만 길 한복판에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까보다도 4마리가 더 늘어서 모두 8마리였다. 앞쪽에 있는 놈들은 뿔이 없었고, 뒤에 있는 한 마리는 기다란 뿔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수놈인 모양이다.
차를 멈추고 기다리노라니 저 건너편 쪽으로는 기다란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무개차(無蓋車)인 것을 보니 아마도 광물을 운반하는 화물차인 모양이다. 재스퍼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Welcome Bienvenue Jasper라는 환영의 문구가 우리를 반긴다. Bienvenue(비앙베누)는 영어의 Welcome이나 마찬가지 뜻의 프랑스어라고 했다. 소화가 다 되어 텅 빈 순대를 채우기 위해 우리가 찾아간 중국식당인 광동식관(廣東食館)에서는 진정으로 우리를 Bienvenue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 다시 오후 tour에 나섰으나 머린 호수 앞 눈에 푹푹 빠지면서 왔다갔다 해서 그런지 식구들마다 꾸벅꾸벅 졸아대는 통에 그만 돌아가 쉬자는 다수결 의견에 의해 민주시민답게 ‘tour 끝’을 선언하고 Hotel로 돌아와 쉬다가 저녁을 먹은 후, Hotel 수영장에서 온몸을 푸는 것으로 하루를 마쳤다. (2012.4.2. 원고지 16매)
'미국 ․ 캐나다 문화 체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 ․ 캐나다 문화 체험기 56) 꿈속에 왕자나 공주가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의 Glacier Park Lodge (0) | 2012.04.05 |
---|---|
(미국 ․ 캐나다 문화 체험기 55) 도깨비 방망이는 어디 가서 찾아야 되나 (0) | 2012.04.04 |
(미국 ․ 캐나다 문화 체험기 53) ‘사악한 강’과 ‘사라지는 호수’ (0) | 2012.04.02 |
(미국 ․ 캐나다 문화 체험기 52) Columbia Icefield에서 설상차를 타고 만년설 체험을 하다 (0) | 2012.04.01 |
(미국 ․ 캐나다 문화 체험기 51) 무상을 넘어 달관의 경지로… (0) | 2012.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