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으려면
이 웅 재
제목이 도전적이다. 누가 그랬을까? 도전은 아름답다고.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른다. 눈앞에 놓인 험준한 장벽, 그것을 뛰어넘으려면 넘어지고 엎어지고, 온갖 고초를 겪어야지만 한다. 그러한 고난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당당히 맞서는 자세는 본받을 만한 것이요,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옆에서 바라볼 때의 감정이요, 도전을 하였던 본인의 경우라면 그 도전에서 성공한 다음의 생각일 것이다. 처절하게 패배하여 나가떨어진 모습은 옆에서 보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본인 자신이라면 더더구나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일이 아닐까?
우리는 어려서부터 인생을 배우면서 살아왔다. 어렸을 때 즐기던 허구많은 놀이들, 그것들은 알게 모르게 삶에 대한 수많은 지침들을 제시해 주었다. ‘가위 바위 보’를 보자. 서로 물고 물리는 게임, 더러는 이길 수도 있지만, 또한 더러는 질 수도 있는 것이 ‘가위 바위 보’가 아니던가? 영원한 승자도 있을 수 없고, 반대로 영원한 패자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놀이의 세계인 것이다.
‘수건 돌리기’를 생각해 보자. 술래가 빙 둘러앉은 사람들의 등 뒤를 돌면서 그 중 한 사람 뒤쪽에다가 눈치 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수건을 놓는다. 그리고는 다시 한 바퀴를 돌 동안 등 뒤에 놓인 수건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사람의 등허리를 가볍게 친다. 그렇게 하여 술래가 바뀌게 되거나 아니면 노래를 한 곡조 뽑는다든가 하는 벌칙을 받는다. 당하지 않으려면 술래가 자기 등 뒤를 돌아가고 난 바로 직후에 뒤쪽을 돌아보면 금방 수건이 놓였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게 되지만, 그것은 비신사적이다.
혹시라도 그럴 수도 있을지 몰라서 다른 장치가 마련되기도 한다. 예컨대 박자에 맞추어 “하나 둘 셋”을 같이 소리치고는 ‘강 이름 대기’나 ‘나무 이름 대기’ 등의 부차적인 놀이를 함께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그 놀이에 정신을 빼앗겨서 자신의 등 뒤에 수건이 놓여진 것을 모르는 수도 있는 것이다. 인생살이도 그런 것이 아니던가? 더 큰 일이 있어도 소소한 다른 일 때문에 그 큰 일을 그만 깜빡 하는 수도 종종 있어 오지 않았던가?
‘수건 돌리기’ 놀이에서는 이와는 다른 방법의 놀이도 병행된다. 자기 뒤에 수건이 놓인 것을 알았을 경우에는 얼른 그 수건을 집어들고 재빠르게 술래를 따라잡는 일이다. 술래가 따라잡히면 역시 가볍게 치는 것으로 술래는 또다시 술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술래는 따라잡히기 전에 자기를 따라오는 사람의 자리에 가서 앉으면 역할 끝이 된다. 그러니까 술래는 수건을 놓을 때 상대가 쉽게 알아채지 못하게 놓는다든가, 상대가 알아챘을 때에는 재빠르게 그가 앉았던 자리까지 도망을 가서 그 자리에 앉으면 다시 술래가 되지 않아도 된다. 말하자면 공소시효가 지나게 되는 일과도 같은 일이라고나 할까? 수건돌리기에서 술래가 술래를 벗어나는 길은 그렇게 이중적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세상사도 그럴 것이다. 생존경쟁의 현장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그렇게 꼭 한 가지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예전에는 어릴 적부터 그런 놀이들을 통해서 살아남는 방법들을 배워왔는데, 요즘에 와서는 그런 장치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된 듯한 느낌이다. 그것도 아이들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하는 교육에서부터 말이다. 한때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 ‘나, 너, 우리’로 되었었다. 제일 먼저 나오는 말, 그것은 ‘나’였다. 서구식 사고방식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것이다. 영어에서의 ‘I’는 ‘you’나 ‘we’와는 달리 대문자로 써야만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이다. 그리하여 요즘은 ‘나’만 아는 세상이 되었다. 거기에다가 더하여 고등학교 때까지는 무시험 전형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학군 따라 집값마저 들썩거리지를 않았던가? 거기에 ‘무시험 전형’의 ‘경쟁’을 무시한 입시정책, 그렇게 자라나던 아이가 갑자기 대학 입시에서는 ‘무시무시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한다. 거꾸로 되었다. 어려서는 ‘우리’ 속에서 살아남는 ‘나’의 술래 탈출 방법을 즐거움 속에서 익혀나가도록 해 주고, 자라서는 그런 힘을 바탕으로 ‘우리’와 더불어 살아나가는 조화로운 인간관계로서의 ‘경쟁’을 가르쳐야 할 것을, 어쩌면 그렇게 송두리째 순서를 바꾸어 버렸던 것일까?
이런 점에서 우리는 스타벅스를 배워야 할 필요를 느낀다. “스타벅스는 웃는데, 카페베네는 왜…”라는 신문 기사가 난 적이 있다. ‘카페베네’는 토종 브랜드요, ‘스타벅스’은 외래 브랜드이다. 그런 점을 생각한다면 스타벅스는 고전을 해도 카페베네는 살아남아야만 하는 것인데, 실상은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스타벅스는 전 매장이 모두 직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카페베네는 약 97%가 가맹점이라는 점도 카페베네가 스타벅스에게 밀리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를 위주로 하는 가맹점보다는 전 매장을 ‘우리’로 묶어서 생각하는 스타벅스가 종업원들의 참여도가 높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커피를 사랑하는 일등 항해사 스타벅(Starbuck)은 복수심에 불타 이성을 상실한 에이해브(Ahab) 선장과 선원들에게 겁쟁이취급을 받으면서도 모두의 안전을 위해 사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스타벅에서 따온 이름 스타벅스는 그 흔한 진동벨을 안 쓰고, 손 글씨로 컵에 고객 이름을 적어 음료가 나오면 이름을 크게 불러준다. 모비딕의 스타벅을 닮은 인간미가 돋보이는 측면이다.
이러한 회사마저도 이제는 제4차 산업혁명이 다가오면서 심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인간관계를 정립해 나갈 필연성이 대두되는 연유이다. 우리 모두 어렸을 적의 ‘수건돌리기’를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다가올 AI 시대에도 굳건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17.4.21.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