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때문에 못 죽는 사내
이 웅 재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며칠 전 DS마트에서 물건 몇 가지를 사가지고 그 물건들을 박스에 넣어 포장을 하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 뚝!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를 다쳐서 침을 맞으러 한의원에 갔던 아내였다. 그 아내에게서 핸드폰으로 전화가 온 것이다. 왜? 허리가 크게 잘못된 것인가? 태산 같은 걱정을 하며 전화를 받았더니, 밑도 끝도 없이 빨리 나오란다.
“홈플러스 앞 공항버스 정류장 알지? 그 앞쪽으로 빨리 나와!”
그리곤 내가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는다. 아내는 성질이 좀 급한 편이다. ‘거북이’라는 별명을 가진 나이기에 그 급함을 눙치고 살지, 나마저 급한 성격이었더라면 사단이 나도 여러 번 났을 터였다.
“그래, 금방 나갈게.”
끊어진 핸드폰 전화에다 대고 나는 말했다. ‘금방’이라고 했지만, 그 ‘금방’은 최소한도 30분 이상은 걸려야 한다. 나는 그때까지 세수조차 하지 않은 ‘거북이’였던 것이다. 그냥 허겁지겁 달려나가도 그곳까지 가려면 빨라야 20분이 넘게 걸리는데, 세수하고 옷 입고…, 그게 ‘금방’일 수는 없었지만, 이미 끊어진 전화, 아내가 그 ‘금방’이라는 소리는 못 들었을 테니까 나름대로 ‘만만디’였다.
그렇게 서둘러(?) 공항버스 정류장 앞쪽으로 가 보니, 그곳에는 전에 못 보던 의류상설매장이 들어서 있었다. 여러 회사에서 공동으로 입주한 모양으로 상당히 넓었다. 해서 여기저기 찾아보고 전화하고 해서 간신히 만났더니, 아내는 이미 바구니에 가득 옷들을 담아놓고 있었다. 모두 남성복, 내 바지들이었다.
만나자마자 아내는 나를 ‘탈의실’로 몰아넣었다.
“빨리 입어 봐요.”
“이걸 왜 사는데?”
하는 내 의견 따위는 끄집어낼 틈도 주지 않았다. ‘들어봐야 헛소리’라는 그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어쩔 것이랴? ‘복종(?)’할 수밖에. 공연히 불씨를 만들어 ‘옥신각신’하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볼 만한 구경거리’는 못 되지 싶었다. 나는 그 바지들을 주섬주섬 챙겨가지고 임시로 만들어 놓은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박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흔히들 ‘탈의실’이라고 부르는 이름부터가 그랬다. 거기가 왜 탈의실인가? 그곳은 옷을 벗기 위한 곳이 아니고, 옷을 입어보기 위한 장소인데 말이다.
『중앙일보』에선가 보았던 기사 하나가 생각났다. 요즘 백화점의 여성 의류 매장 탈의실은 아주 고급스러워졌다는 기사였다. 거기선 ‘피팅룸(fitting room)’이라는 말을 쓰면서, 그 ‘피팅룸’은 공주방처럼 꾸며져 있다고 했다. 예쁜 거울, 빨간색 카펫에다가 화려한 소파까지 비치되어 있어 함께 온 사람도 같이 들어가서 새 옷 입은 매무새를 보아줄 수 있게끔 만들었단다. 외래어가 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착의실’이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하루빨리 적당한 우리말 이름을 붙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해 보았다.
원래 의류매장 탈의실 안에는 거울을 걸지 않는다. 손님이 옷을 입은 모습을 스스로 비춰보고 나서 사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그 임시 구조물 속에서 비춰지는 모습이 멋져 보일 리가 없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손님이 빨리 다시 매장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탈의실은 어둡고 좁게 설계하여 만드는 것이 대세이지 싶다.
그런데 이곳은 해도 너무했다. 그러지 않아도 찜통 더위인데, 좁아터진 공간에서 바짓가랑이 한 쪽을 다리에 꿰려고 했다가 그만 휘청했더니, 웬걸, 탈의실이 따라서 휘청하고 있질 않은가? 재빨리 몸의 중심을 잡은 후 옷을 입고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무엇보다도 시원했다. 얼핏 ‘자유!’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랬다. ‘자유’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내는 내 반바지, 여름바지, 가을바지, 겨울바지 등 바지만 4개를 샀다. 나는 걱정이 앞섰다. 저걸 언제 다 입어서 헐어 수명이 다하게 할 수가 있을 것인가를 생각했던 것이다. 2015.11.5자 『조선일보』를 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약 82세였다. 그것은 물론 한국인 전체의 평균치이니까 그것보다는 훨씬 더 오래 살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널널하게 생각을 해 보아도 저런 식으로 사다 놓은 바지며, 점퍼, T셔츠, 남방 따위를 언제 다 입어서 헐게 만들 수 있을까 걱정이 에베레스트산 같았다. 태산이야 1,505m밖에 안 되지만 에베레스트산은 8,848m나 되니 태산보다도 약 6배나 더하니까 말이다.
요즘처럼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무덥거나,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만나거나, 모든 일이 생각대로 되어주지 않아서 주체하기조차 힘들 때면, 이젠 살 만큼 살았으니 죽어버리는 것이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오늘처럼 사다 놓은 옷가지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아직 한두 번도 못 입어 본 옷도 많은데 어떻게 죽나 하는 쓸데없은 생각이 솔솔 피어오르는 때가 있다. 이런 걸 두고 ‘쓸데없는 걱정’, ‘기우(杞憂)’라고 하였다지, 아마? 그래, 그렇다. 그게 바로 ‘걱정도 팔자’인 거다.
오늘 아침에는 아내가 친구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아내 친구가 남편에게 새로 남방을 하나 사다 주었는데, 좋다고 하면서(입바른 소리였겠지만) 그대로 벌렁 침대에 눕더니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더란다. 내가 새로 산 반바지를 입고 탄천 산책을 나가겠다고 했을 때, 어이없어하던 아내가 심드렁하게 한 마디 툭 내뱉는다.
“지가 벌어놓은 돈, 지가 쓰고 가면 안 돼?”
놀랐다. 그러면서, ‘아내 때문에 못 죽는 사내’는, 이젠 아내가 사들이는 옷에 대해서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지 않을 예정, 아니 ‘각오’를 다졌다. (17.8.19.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