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으세요
이 웅 재
지하철을 탔다. 경로석 앞이었다. 앞좌석 셋은 모두 만석(滿席)이었다. 한 정거장을 지나는데 내 앞에 앉아 있던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가 나에게 눈짓을 한다. 자기는 내릴 터이니 나보고 앉으라는 신호였다. 그런데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늙수그레한 할머니였다.
할아버지가 내렸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 할머니에게 말했다.
“앉으세요.”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있었다.
“앉으세요.”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앉으세요.”
그 할머니가 다시 내 말을 따라 했다.
“앉으세요.”
아마도 그 할머니는 할머니로 보이는 것이 싫어서였을까, 못 이기는 척 내가 앉았다. 그리곤 곧 생각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이라도 하고 앉았어야 했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그 자리에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할머니가, 아니 아주머니가 “앉으세요.” 하고 내 말을 받아서 말할 때에 냉큼 앉아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한 번 더 “앉으세요.”라고 말한 것은 상대방이 내게 한 말 “앉으세요.”가 빈말이 아니었나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고.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확인 차 두 번째의 “앉으세요.”를 말했고, 다시 그 말이 되돌아오자 나는 머뭇거림도 없이 재빨리 앉아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말로 그 아주머니(?)가 앉기를 바랐다면 한 번 더 “앉으세요.”라는 말을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아주머니가 나에게 “앉으세요.”라고 말한 것은, 내리는 할아버지가 나에게 앉으라는 눈짓을 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나는 덜컥 그 자리에 앉았고, 앉기에 바빠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런 것은 어쨌든 곰곰 생각해 보니, 나는 남에게 늘 받기만 하고 살아온 것 같았다. 주기도 하면서 살아왔어야 하는데, 그런 기억은 별로 없다.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에게 천 원짜리 한 장쯤 건넨 일조차 없었던 것 같았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나 자신이 ‘준다’는 일에 익숙해져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주어야지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받아야지 줄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일은 아닐 것이다. ‘주다’와 ‘받다’는 과연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 말일까? 그 말의 선후 관계를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주다’가 먼저라야 될 성 싶었다. 주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이지, 받아야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도 ‘주고받다’이지, ‘받고주다’라고 하지는 않는 일이 아니던가? 한자어를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수수(授受)’라는 말에서 ‘주다’의 뜻인 ‘授’가 먼저 쓰이고, 나중에 ‘받다’의 뜻인 ‘受’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영어에서도 마찬가지다. ‘give and take’라고 말하지 ‘take and give’라고 말하는 일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나는 주는 일에 둔감했던 것일까? ‘둔감’, 둔감이라고? 그건 둔감이 아니었다. 내겐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게 어찌 ‘둔감’일 것인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이었나? 나로 하여금 ‘무일푼’으로 살아가게 만든 일, 그것은 ‘시대’였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6‧25였다. 1‧4후퇴 당시, 부모님과도 헤어져 3남매가 피난민 수용소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사람처럼 부러운 사람이 없었다. 내게는 남에게 줄 수 있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때 내게는 ‘준다’는 말 그 자체가 사치였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계속되는 삶 속에서 아예 굳어진 습성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보들레르는 산문시 『파리의 우울』에서 말했다.
“내가 카바레에 들어서려고 할 때, 거지 한 명이 자신의 모자를 나에게 내밀었다.…나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단 한 번의 주먹질로 그의 이 두 대를 부러뜨렸고, 나는 내 손톱 하나를 부러뜨렸다.…거지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나의 얼굴을 가격했다.…그의 주먹은 나의 눈을 멍들게 했고, 내 이를 네 개나 부러뜨렸다.”
보들레르와 거지는 그렇게 하여 대등해졌다고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보들레르는 거지에게 그나마 줄 것이 있었던 것이다. 주먹질, 주먹질 말이다. 그래서 주고서 받았다. 그런데 나는 줄 것이 없었다. 보들레르에게는 그래도 용감함이 있었지 않았는가? 용감함이 아니라고? 그렇다 치자. 용감함이 아니라면 무모함이라고나 해 둘까? 내게는 그러한 용감함도 무모함도 없었다. 그때 내 나이는 10살쯤밖에 되지 못했을 때인 데다가 아이들에게는 가장 든든한 ‘백’인 부모님마저도 없었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상대편 쪽에 자리가 하나 비었고, 그 할머니는 다시 아주머니가 되어 ‘잽싸게’ 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우리 또래의 할아범들은 그걸 제일 싫어한다. 우리네 아줌마들의 그 ‘잽싼’ 행동거지 말이다.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가 굳이 나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던 것도 바로 그런 것이 싫어서 내게 눈짓을 했던 것으로 여겨졌고, 그 아주머니도 그런 낌새를 느끼고 내게 “앉으세요.” 하는 말을 되돌려 보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모처럼 보들레르까지 떠올려 보았던 내 생각이 ‘받기만 하고 줄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자격지심까지 불러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전이되면서, 나는, 아, 나는, 갑자기 초라해지기 시작하였다. (17.8.13.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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