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 뽑는 날
이 웅 재
병원과 전당포에는 자주 가지 말라고 했다. 이젠 우리나라도 먹고 살 만해지다 보니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전당포에 갈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예전엔 골목골목마다에 널려 있던 전당포 간판은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병원이야 어디 그럴 수가 있는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병원과는 점점 더 친해지게 되어 버리니, 이사를 다닐 적에도 병원 가까운 곳만 찾게 되는 것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감기 따위로 병원을 찾는 일이야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 큰 문제될 것은 없을 터, 감기가 아니더라도 수술을 받아야 할 만큼의 병치레가 아니라면 그런대로 무시하고 견뎌볼 만도 하다. 그렇지만 여기만은 가고 싶은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가고는 배길 도리가 없으니 문젯거리다. 그곳이 어디인가? 그곳은 바로 치과, 치과인 것이다.
오늘은 아내와 내가 치과에 가는 날이다. 우리는 대부분 같은 날에 치과에 간다. 나는 사람 자체가 좀 부실해서 치아까지도 나를 닮아 위아래로 8대나 임플란트를 한 처지이다 보니 3개월마다 사후 점검을 위하여 치과엘 다녀야 한다. 아내는 나와는 반대로 치아가 비교적 튼튼한 편이다. 하지만 늙는 데에야 장사가 있나? 해서 가끔 이가 아플 때도 있고 하여 아예 내가 가는 날이면 함께 다니기로 했다.
우리가 다니는 치과는 좀 먼 양평에 있다. 분당에서 치과까지 지하철로는 2시간 반쯤 소요된다. 단골 치과는 원래 서울에 있었다. 그런데 담당의사 분이 몇 번 대학병원을 옮기시더니 느닷없이 고향이라는 양평에다가 새로이 치과를 개업한 것이다. 우리 내외의 치과 나들이는 가까운 곳이라면 필요에 따라 따로 다니는 게 편하겠지만, 먼 곳이다 보니 혼자서 왔다갔다 하는 것보다는 동무도 될 겸해서 함께 다니고 있다. 그래서 치과에 가는 날은 모처럼의 부부동반 외출날이 되는 셈이라서, 이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성격이나 행동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 까닭에 가끔씩 티격태격하길 잘한다. 해서 오늘 나는 특별히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을 하였다. 최소한도 너댓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외출이다 보니, 서로서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해 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선 치과까지 가고 오는 데에 이용하는 교통수단에서부터 우리는 서로가 한 발씩 양보를 했다. 나는 ‘거북이’라는 별명답게 느릿느릿 움직인다. 정년퇴직도 했겠다, 바쁠 일 하나도 없으니 시간이 좀 많이 걸리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아내는 다르다. 아내는 지겨운 건 딱 질색이다. 행동도 판단도 빠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 보면 그러한 성격의 차이가 아주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아내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걷는다. 나는 그 반대다. 한마디로 나는 우유부단한 편인데, 아내는 모든 일의 결정에도 과감하다. 사람들은 그러한 우리를 보고 말한다. ‘성격이 서로 뒤바뀌었더라면 이상적인 부부가 될 뻔했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보기에 우리 부부는 ‘이상적이지 못하게 보이는 부부’라는 의미이리라. 괘씸하기는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닌 듯해서 우리는 무언으로 서로가 한 발씩 양보하기로 하고 살아가는 편이다. 갈 때는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시외버스를 타고 가고, 올 때는 여유만만하게 지하철을 타고 오기로 한 것도 그와 같은 암묵적인 의도가 깔려 있는 처사이다.
오늘, 나는 혹시라도 느린 티를 내게 될까봐 꿀 같은 늦잠도 마다하고 일찍 일어나 서둘러 외출할 차비를 차리고 나섰다. 그런데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체크무늬 T에다가 체크무늬 점퍼를 입으면 어떡해요?”
그래서 T를 바꿔 입었다.
“바지는 왜 또 검정색이에요? 미색도 있는데….”
이번엔 나도 대꾸를 했다.
“아직 미색을 입기에는 좀 이른 것 같아서….”
그런데 예상 외로 무사통과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어금니를 뽑아야할 것 같다고 했었더니, 그런 처지의 나를 배려하는 때문은 아닌가 싶었다. 평소 같으면 한 가지쯤 더 지적 사항이 있을 법한데, 그런 일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집을 나서서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아내 걸음이 느렸다. 아내는 보폭이 넓다.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앞서서 걸어가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조금은 의아스럽기조차 하였다. 아마도 나의 ‘어금니 뽑는 날’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가서는 양평행 승차권도 아내가 샀다. 어금니를 뽑는 날이라서 그럴까? 누구나 어렸을 적부터 이빨을 뽑는 일은 아주 질색할 일이 아니던가? 앞으로도 계속 어금니를 뽑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버스도 기존의 도로가 아닌 새로 뚫린 ‘성남-이천로’로 달려서 그러한 아내의 호의에 보답하는 듯 빠른 길로 가고 있었다. 날씨가 아직 쌀쌀하기는 했지만, 막히지 않고 달리게 되니 마음마저 시원해졌다.
어금니는 아주 쉽게 뽑아버릴 수가 있었다. 물론 국소 마취는 하였지만, 한 동안 건성으로 달려있었던 실정이라서 언제 뽑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싱겁게 뽑혀져 버린 것이었다. 의사는 말했다.
“이 어금니는 맨 안쪽 것이고 바로 옆의 것이 임플란트이니까 새로 해 넣지 않아도 별 지장이 없겠습니다.”
그러니까 몇십만 원의 추가 치료비도 필요가 없었다. 아내가 말했다.
“아팠지요?”
나는 하마터면 ‘전혀 안 아팠는데….’라고 ‘진실’을 말해버릴 뻔하였다. 나는 아내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말했다.
“조금은….”
큰 걱정은 하지 말라는 투의 대답이었다.
뽑힌 어금니는 그렇게 내게 느긋한 심사를 즐길 수 있게까지 하여주고 있었다.
(18.5.4.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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