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을 ‧ 가로수 (이웅재 칼럼(20), 월간 『스포츠 한국』73년 11월호, pp.82~83.)

거북이3 2021. 1. 16. 15:09
21.2.15.가을.가로수 (이웅재 칼럼(20), 월간 『스포츠 한국』73년 11월호, pp.82~83.).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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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월이다. 가을인 것이다. 가을만큼 빨리 가는 계절도 없다. 시월은 더욱 수월하게 지나간다. 「아-(하품 한 번 길게 하고) 가을인가 봐!」하고 멋진 세리프를 한 마디 뱉고 보니, 벌써 가을은 그 짤막한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겨울의 골목으로 사라져 가더라는 우스개는, 그런대로 가을의 빠름이나 짧음을 나타내는 데 있어 近似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현대를 초스피드 시대라고 하던가? 두 살 난 자식 놈이, 「나 장가 갈 테야」하고 보채는 바람에 삼십 전의 신혼 부부가 며느리감 구하러 다녀야할 그런 바쁜 세대이고 보면, 초스피드 세대라는 현대라는 것에 대해서, 네째 딸 시집 보낸 집 쌀독에 낟알 떨어지듯 정나미가 똑 떨어져 버리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천만다행이라고나 할까, 아직은 그렇게까지 보채는 놈이 없는 처지이니 그 놈 태어나기 전에나 가을이란 게 무척은 빠르더라는 얘기를 장사꾼 인심 쓰듯 덤까지 얹어 가며 싫컷 얘기해 볼 수밖에……. 「빠르다」는 개념은 실상 혼자서는 생겨날 수가 없는 것. 그것은 반드시 「느리다」는 개념과 비교됨으로써 가능해 지는 하나의 관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일찌기 아인슈타인 박사도 이 평범한 진리에서부터 저 유명한 「상대성 원리」를 발견해 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그 유명한 원리를 외국인에게 빼앗긴 것이 분한 마음 안 드는 바도 아니지만, 동방예의지국에 사는 양반의 자손이 그까짓것 가지고 배를 앓으면서 동네 약방에 돈 벌게 하여 줄 수야 없는 일이고 하니, 애시당초 얘기를 꺼집어 내었던 「빠르다」는 얘기나 계속할 수밖에는 없겠는데……. 사람을 기다려 본 사람이라면, 10분이나 5분과 같은 시간의 길이가 평소의 10분이나 5분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기다린다는 것은 왜 그렇게 지겨운 것일까? 지기지기하게도 지겨울 때, 우리는 그 시간의 길이를 평상시의 것보다 몇곱절이나 더 길게(느리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빠르다」는 느낌은 단순한 의식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각각 3개월씩인데, 어떤 계절이 빠르고 어떤 계절이 느릴 이치는 없는 것이다. 가을이 빠르다는 건, 단순히 가을이 빠르게 느껴지는 때문 이외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면 가을은 왜 빠르게 느껴지는가? 길게(느리게) 느껴지는 것이 지겨움 때문이라면, 빠르게 느껴지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무엇 때문일까? 가을은 男性의 계절이라고들 한다. 가을을 남성의 계절이라 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男性들이란 바쁜 존재이다. 「田」字에 「力」字를 받친 「男」字가 그걸 증명해 줄뿐 아니라, 「바깥 냥반」이란 말로서 「안사람」,「아내」(안해) 또는「계집」(집에 계시다는 뜻에서부터 나온 말이라는)과 대칭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남자란 바쁜 존재, 밖에 나가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활동을 하여야 하는 존재라는 걸 알 수가 있겠다. 그렇게 바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白髮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하던 麗末 禹 倬의 歎老의 시조나, 저 유명한 盛唐時의 放浪詩人 李 太白의 「將進酒」에 나오는 한 대목인 「朝如靑絲暮成雪」(아침에 푸른 실과 같이 빛나던 綠髮<검은 머리>이 저녁에 백설과 같은 흰 머리가 됨)이란 싯귀처럼, 어느새 젊음이란 간 곳이 없고 인생 전체를 조감(鳥瞰)할 수 있는 나이에 들어서게 되고, 그제서야 지나간 생애를 돌이켜 보며 추연(惆然)한 심회에 빠져 들 수 있는 것이니, 바로 그런 男性들의 처지가, 마치 겨울의 문턱에 다가선 가을 마음(秋心=愁, 또는 秋意)과 同類項이 되는 것이다. 果是 가을이 男性의 계절이란 말이 나올 법하지 않은가? 딱이 男性뿐이 아니라 女性들의 경우라 하더라도, 가을은 추창(惆悵)한 심려(心慮) 속으로 빠져드는 계절, 思索의 계절이다. 思索은 번거로움을 취하지 않는다. 그것은 좀더 靜的인 분위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뢰(無賴, 아무 소리도 없음)의 정적을 전제 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명상(冥想, 瞑想)에나 적합할 일이지 사색에는 필요하지 아니한 것이다. 명상이란 보다 철학적인 것, 정밀(靜謐: 고요하고 편안함) 속에서 돈오(頓悟 문득 깨달음)함을 얻을 수 있는 선적(禪的)이요 종교적인 것이다. 구태여 명상과 참선(參禪)을 구별해 보란다면 명상은 철학적이오, 참선은 종교적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색이란 훨씬 人生的이다. 그러므로 사색은 조용히 흘러나오는 名曲의 가락쯤은 오히려 바라는 바다. 그러한 가락(Melody)이 없을진댄 그는 차라리 거리로 뛰쳐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음에 귀청이 멍멍한 거리의 公害나 恐害를 貪하는 건 아니다. 그는 한적한 공원이나 人蹟이 드문 街路에서 살기를 바란다. 가을은 사색을 낳고, 그 사색은 한적한 거리에서 자라는 것이다. 街路의 정취는 가로수와 가로등에 있다. 가로수 없는 街路, 가로등 없는 街路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맨숭 맨숭하고 또 얼마나 索漠(索莫, 索寞)할 것인가? 人生을 조감할 수 있는 初老이 나이에 들어서 지나온 생애를 돌이켜 보는 것과도 같은 심경을 자아내게 하는 게 가을이고, 해서 가을이 男性의 계절이라 하였듯이 지나간 자기의 생활 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쌓여 있을 것인가? 인생을 조감할 수 있는 나이가 꼭 초로에 접어든 때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도 그것은 삼십은 넘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한평생을 짧게 60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하긴 예전에는 人生七十古來稀라 하였고, 還甲이 六十이니, 六十이란 세월이 짧은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요사이처럼 의학이 발달하여 수명이 길어지다 보니 六十人生이란 짧은 一生이 아닌가? 어쨌든 그 짧은 六十人生이라 하더라도 三十은 넘어서야만 人生이란 걸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人生을 고개에다 많이 비유하고들 있는데, 바로 그 고갯길로 따지더라도 절반쯤 되는 곳에는 올라가야 頂上이 되질 않는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둘 다 보일 수 있는 위치는 아무래도 중간쯤에는 올라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니 三十은 되어야 죽음으로 향하는 길도 보일 것이다. 지난날의 과거라는 것은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으로서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니, 인생을 조감하려면 아무래도 三十 이상이면 될 성부른 것이다. 三十이 넘도록 지나온 젊은 날의 수많은 사연들, 그것은 얼마나 소중한 추억일 것인가? 죽음이 바라보이는 나이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한 순간 한 순간이 또한 얼마나 아까운 시간들인가? 아까운 시간, 안타까운 시간, 그러한 시간들은 또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가? 맞았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우리 모두는 가을을 어물쩍하다가는 지나가 버리는 재빠른 계절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봄철에 싹이 돋고 꽃을 피워, 여름철의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기다리고 기다리다가(그러니 여름은 길게 느껴지리라.) 한 해의 중간을 성큼 넘어서면서 결실의 가을을 맞고, 그 가장 보람 있고 풍요로운 가을을 아쉬워하다 보면, 가을은 「아-」(「가을인가?」의) 소리와 함께 훌쩍 지나가는 것이 아니랴? 더구나 그 뒤엔 암흑의 겨울이 도사리고 있고. 아쉽다. 무척이나 아쉽다.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임이라도 떠내밀내듯 시월이 가는 것이 아쉽다. 아- 하는 사이에 이 글을 쓰는 시월도 가버리고, 가을이 마지막 턱걸이를 하는 동짓달, 11월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이 활자로 변하여 나오는 것도 그 11월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빠른 것이냐? 가을아. 「이시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쏘냐? 무단히 네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난다? 그래도 하 애닯고야, 가는 뜻을 일러라.) 成宗大王이 늙은 어버이를 섬기기 위하여 致仕(벼슬을 그만둠)하고 고향으로 歸鄕하는(落鄕이 어감상으로는 좋으나 이럴 때는 落鄕이랄 수는 없는 것이니 내 글만 위할 수는 없는 일 역시 안타까운 일 아닌가?) 寵臣 兪 好仁을 두고 읊은 시조 가락도 아마 가는 가을을 슬퍼하는 내 마음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요, 사색이 조용한 선율의 음악을 만나지 못할 때에는 거리로 뛰쳐 나오게 되고, 그 거리(가로)의 정취는 가로수에 있다고 했으니, 나의 지나간 三十여년 동안의 허구 많은 사연들도(고작 三十여년이라니 건방지기도 하지만) 몽땅 조용한 거리로 이끌고 나와야 하겠다. 古來로 「淸富」란 말은 지어내지도 않았고, 자랑 삼는 게 「淸貧」뿐인 오리엔트의 자손이라서일까? 요새 그 흔해 빠진 궁전 같은 내집은커녕 조그만 방 안에 내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名曲들조차 골고루 구비되지 못한 처지이고 보니, 그나마의 빈약한 사연들이나마 거리고 내쫓을밖에 별 뾰죽한 수가 있겠느냐 말이다. 거리인들 어떠랴. 가로수만 제대로 구비되어 있는 거리라면. 가로수, 가로수만은 있어야 하겠다. 은행 나무도 좋고, 플라타너스도 좋다. 나는 그 유실수의 가로수가 더욱 좋다. 열매 하나하나에다가 우리들의 사연을 익히자. 올망졸망한 얘기들이 딩구는 거리. 그 오손도손한 얘기들은 가로수가 없으면 依支할 곳이 없다. -가로수가 있고, 책이 있고, 그리고 여인이 지나 간다. 여기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이다.- 파리와 세느강가의 가로수를 바라보며 누군가가 중얼거린 이 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가로수야말로 잃어진 추억을 되살려 주고, 도시인의 가난한 꿈을 키워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외로이 가로수, 밑을 거닐면, 쓸쓸하게 굴러가는 낙엽이여. 저녁 노을에 물들어 새빨간, 저기 소녀의 꽃 같은 얼굴이여. 어디선가 본 듯싶은 얼굴에 낙엽이 한 잎 떨어져, 외로이 가로수, 밑을 거닐면, 이다지도 내 마음이 외로워라.- 언젠가 우연히 배우게 되었던 김 동진 씨 편곡의(작사자는 뱅글뱅글 돌면서도 생각이 안 나고) 「가로수」(?)란 노래가 가는 가을의 서글픔을 돋우어 주는 듯하다. <경성 고등학교 교사> (21.1.15. 27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