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 황부자
이 웅 재
오래간만에 공연을 보러 갔다 왔습니다. MBC마당극 '마포 황부자'. 얼마 전에는 입장료 15만 원이라는 공짜 초대권이 생겨서 예술의 전당으로 오페라를 보러 갔었다가 중간 휴식 시간에 그냥 땡땡이를 친 적이 있었습니다. 오페라란 노래가 주가 되는 것인데, 그 노래가 외국어로 나오니 무슨 재미를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말이 통해야지요, 말이….
등장인물만 해도 100여 명이 넘고, 주연배우는 누구누구고…, 엄청 자랑을 하며 대단한 선전을 한 오페라였지만, 한 마디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관심이 대단한 젊은 사람들마저도 나와 같이 중간 휴식시간에 슬금슬금 자리를 뜨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연장은 금방 휑뎅그레해지데요. 그렇습니다. 살아가노라면 말이 안 통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마당놀이는 말도 통할 뿐 아니라, 우리의 정서에 알맞은 가락의 노래들이 흘러나오니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리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나는 할 수 없는 한국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꼭두쇠 김종엽과 황두껍이라 불리는 구두쇠 황득업 역의 윤문식, 그리고 돈이 없어 죽은 아내가 남겨놓은 딸 금만이 역 김성녀의 콤비가 그리 잘 어울리데요. 실은 마포 황부자집 사위를 제가 잘 알았었는데, 그 친구도 이걸 보게 되었는지 어떤지 모르겠네요.
돈이 없어 아내마저 잃게 되어 돈에 원한이 맺힌 황득업, 그는 새우젓 장사를 해서 부자가 됩니다. 그가 부자가 된 방법은 단 한 가지. 일단 한번 들어온 돈은 절대로 쓰지 않는 것이었지요. 오죽하면 팔도 구두쇠 대회에 출전한 자린고비에게 새우젓만 해도 밥맛이 꿀맛인데 그 비싼 굴비는 무엇 때문에 샀느냐고 심하게 힐난까지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새우젓 사려, 새우그라, 세우그라.”
새우젓 많이 먹어야 마누라한테 대접받는다며 새우젓 장사를 하는데. 한 관객 앞으로 가서,
“새우젓 사이소.”
은근히 권합니다. 아마 그 관객 안 산다고 했는지, “이 집은 새우젓 안 먹어도 늘 선다네요.”
그 말에 와르르르…웃음바다가 입니다. 고상하고 고상한 외국말로만 하는 오페라보다 100번, 1000번, 10000번 나은 게 우리의 마당놀이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옛날 고려 중엽 인종(仁宗)때였었던가, 음서(蔭敍)로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신분이면서도 굳이 실력으로 과거 급제를 하고야 말겠다며 대단한 오기를 부리던 우리의 임춘(林椿) 선비, 급제 한 번 못 해보고 무신정권을 맞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던 전답마저 몽땅 몰수당하고서는 하늘을 향해 탄식을 하였더랍니다.
“아아, 하늘도 무심한지고. 내게는 이제 송곳 하나 꽂을 만한 땅도 없구나.”
돈에 원한이 맺힌 것은 황부자보다 원조 격인 그는 ‘공방전(孔方傳)’이라는 가전체 소설을 썼습니다. ‘孔’은 구멍 공, 곧 둥근 모양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요, ‘方’은 모 방, 그러니까 네모난 모습을 형용하기 위한 것인즉, 둥근 모양 속의 네모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물건, 것은 바로 엽전의 형상이지요. 네모난 모양은 춘하추동, 즉 계절을 나타내는 것이면서 동서남북의 방위도 겸하여 드러내는 것이고, 둥근 모양은 순환원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돌고 돌아야 하는 것이 돈이라는 것인데, 한번 들어온 돈을 사채고리업으로만 유통시킬 뿐 다른 일로서는 꿍쳐두기만 하니, 황부자의 돈벌이 방법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돈 한 푼에도 벌벌 떠는 황부자이지만, 동네 제일의 불량배인 외동딸 금만이가 흥청망청 쓰는 돈은 어쩌지를 못합니다.
“아이고, 어머니….”
하면서 돈 때문에 죽은 엄마를 들먹이면서 아빠에게서 돈을 뜯어내어 밤새도록 똘마니들과 함께 술타령을 하는 금만이는 황부자 때문에 집안이 거덜 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거금을 뿌려 도와줍니다. 당시 의적이라 알려진 ‘아지매’는 바로 금만이, 일지매도 그녀 앞에서는 쪽도 못 쓰는 별 볼일 없는 도적일 뿐입니다.
그러한 그녀에게 애인이 생겼는데 그 애인이란 자가 바로 어머니가 죽어갈 때 기생놀이를 하면서도 황득업이 약값 한 푼만 보태달라고 하여도 발길질만 하고 갔던 부자 놈의 아들 무숙이었습니다. 그가 중국과 무역을 하려는데 돈이 분족하여 황부자에게 빌려주기를 부탁하자 황부자,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드디어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무이자로 돈을 빌려줍니다. 단, 제날짜에 돈을 갚지 못하면 황부자가 원하는 부위의 살코기 한 근을 베어주기로 계약을 하고서이죠. 동양과 서양의 문학이 손을 맞잡은 것입니다.
황부자는 밤낮으로 무역선이 제 날짜에 돌아오지 못하기만을 빌고 빕니다. 그의 입에서는 늘 ‘뺑그르르 꼬르륵’이란 말이 떠나질 않습니다. 무숙이의 무역선이 태풍에 뺑그르르 돌고 돌다가 꼬르륵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으라는 일종의 주문이었지요. 그러한 그의 앞에 무숙의 무역선이 난파하는 것을 보았다는 심청이가 나타납니다. 춘향전과 홍길동전을 접목시켜 보았으면 하던 평소의 생각이 다시금 힘을 받는 대목이었습니다.
드디어 무숙이에 대한 재판. 재판관은 처음 김종엽이었지만 인정에 호소하려는 재판관을 못마땅하게 여기자 새로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법밖에 모르는 새로운 재판관을 대신 등장시킵니다. 그 다음 얘기는 베니스의 상인 그대로. 다른 점이라면 그 새 재판관이 황부자의 딸 금만이가 변장하였던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어서 무역선이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점, 그래서 모두가 흥겹게 뒤풀이를 하게 된 점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당놀이, 파이팅, 홧팅, 핫팅, 하팅, 하딩, 아딩….
단지 장충체육관이 문제였습니다. 추워서 입이 다 얼어붙었던 것이지요. 그래도 요새 아이들 말로 ‘잼 이써써요. 증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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