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었다
이 웅 재
문제가 생겼다. 금요일 저녁 8시였다.
“집에서 몇 시에 떠나야지?”
아내에게 물었다.
“난 안 가!”
영화 구경을 가자는 말에 아내가 딴죽을 걸었다. 아내는 영화 구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마당극 같이 재미있는 것은 그런 대로 좋아하지만 소위 클래식이라고 하는 극장이나 공연장의 프로에는 관심이 없다. 이유는 눈이 나쁘기 때문이다. 그런 걸 미리 감안했어야 하는 건데….
“뭐, 안 간다구? 그럼 난 어쩌구?”
딸내미가 토요일 오전 11시 45분 상영의 영화 관람권 2매를 예약해 놓은 것이 발단이 되었다. 상영관은 삼성역 지하 1층의 메가박스. 처음에는 제 남편과 같이 가려고 했던 것인데, 시어머니께서 내장산 가을 단풍 구경을 가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영화 관람권 2장이 공중에 떠버린 것이다. 갈 곳이 없어 우리 집으로 밀려온 것까지는 좋았다.
큰아들도 주 5일제를 실시하는 직장이니까 쉽게 땜질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사단이 벌어지려니까 하필이면 그날 당직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일이 풀리느라 그랬는지 군의관으로 사천비행장에서 복무하고 있는 작은아들이 외박을 나와 있기에 됐구나 싶었는데, 얼씨구, 그 시간에 친구 결혼식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없이 아내를 모시고(?) 내가 갈 수밖에 없다고 잔뜩 치부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꽁무니를 빼는 것이다. 미리미리 상황 판단을 했더라면 같이 구경을 갈 만한 짝꿍을 물색하는 건데…, 이런 낭패가 있나?
만만한 H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간에 웬 일인가 의아해 하는 그에게 다짜고짜로 내일 함께 영화 구경을 가자고 윽박질렀다. H교수는 선선히 응낙하였다. 사연이 이쯤 진행이 되어서 한 시름 놓고 있었는데, 이를 어쩐담?
이튿날 아침 9시쯤 되어서 화장실에서 배설의 쾌감을 누리고 있는 나를 불러내는 핸펀 소리…. 예감이 불길했다.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부터 꽉 잠긴 그는, 미안하단 소릴 고장 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한 달 넘게 미국에 출장 가 있던 마누라가 돌아오는 새벽 한 시에 마중도 못 나가면서 밤새 부어라 마셔라 했다는 것이다.
난감했다. 개봉 첫 주 전국 63만 관객을 동원한 흥행물이라고는 하지만, 이 나이에 혼자서 조폭영화 관람이라니? 우선 탄천 산책을 하면서 여기저기 함께 영화구경 가 줄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어찌 이럴 수가? 철두철미 샐리의 법칙을 믿고 있는 내게 보란 듯이 머피의 법칙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1시간 정도의 산책을 마친 나는 샤워를 하면서 확인했다. 정말로 내가 만나보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는 점을. 결혼식에 가야 하기 땜에, 동창회에 나가야 하니까, 지방에 가 있어서, 요즘 무척 바쁘다구…, 핑계 없는 무덤이 어디 있었던가?
허탈했다. 영화 한 편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니…. 그 동안 나는 세상살이를 허투루 했구나 하는 자괴감이 엄습했다. 서글펐다. 하지만 그건 진리였다. 서로가 이런저런 부탁을 했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때로는 약속까지 해 놓았다가도 지키지 못해서 미안했던 허다한 사람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도 그들을 잊었고, 그들도 나를 잊었다. 그랬다.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를 잊고 지냈던 것이다.
‘거룩한 계보’. 영화의 제목이었다. 제목으로 보아서 일단 아무래도 내겐 걸맞지 않는 영화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본질을 벗어난 곳에 있었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고, 보느냐 보지 않느냐가 문제로서 떠올랐던 것이다. ‘보느냐 보지 않느냐?’ 누가 그 대답을 해줄 수 있는 것일까? 아, 그 대답은 이미 내가 정해 놓고 있었다. ‘보아야 한다’고. 왜? 사람이 그렇지 않은가? 사람에겐 동물과 다른 차원의 결단, 말하자면 그래, ‘오기’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시간은 10:30쯤. 나는 서둘렀다. 하지만, 한번 발동되기 시작한 머피의 법칙은 가는 곳마다 나를 약 올렸다. 11시가 되어서야 버스를 탈 수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야 있었겠지만, 반시간씩이나 기다려야 했던 나는 불만스러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출근 시간도 아닌데 인터벌이 길었던 때문인지 버스는 만원이어서 서서 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많다 보니 후덥지근했다. 그런데도 운전기사는 에어컨을 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마도 열 받은 나만 덥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뿐인가? 성남시로 빠지는 도로 못 미쳐서부터 길은 막히고 있었다. 가다 서고 가다 서고…, 이래가지고서는 예정시간까지 도착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났다. 평소라면 한 30분쯤이면 목적지까지 넉넉히 도착할 수 있었는데 이처럼 길이 막히다니? 길은 복정동 갈림길까지 막혔고, 시간은 11:15분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그 다음부터는 대체로 길이 뚫려진 상태였지만, 그러나 신호 대기 등에서 지체하다 보니 삼성역 도착시간은 11시 35분. 이제는 10분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부랴부랴 지하보도들 통해 코엑스 쪽의 안내소에 도착한 시간은 40분. 남은 시간은 5분이었다. 안내양에게 물었더니, ‘요쪽으로 쭉 가시면 회전문이 나오는데 그 문을 통과하여 7분쯤 계속 가시다 보면 나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예정시간에는 도착하기 힘들다는 얘기였다. 관절염으로 아픈 다리를 이끌고 뛰다시피 하여 도착한 시간은 11시 47분. 영화는 이미 상영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광고 등으로 인해서 본 영화는 12시쯤 시작되었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나는 ‘거룩한 계보’를 혼자 관람했던 것이다.
(06. 11. 31. 원고지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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