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지엔느

차가움에 대한 편견

거북이3 2006. 2. 15. 15:24
 

   차가움에 대한 편견

                               이   웅   재

 온 세상이 하얗다. 산에도 들에도 지붕 위에도 하얀 눈이 덮였다. 전국이 온통 하얗다. 북쪽 지방보다는 남쪽 지방에 훨씬 많은 눈이 내렸다. 여기저기 눈 피해 소식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눈은 한 송이 한 송이의 개체로 보아서는 매우 약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그 눈들이 내려서 쌓이고, 쌓여서 합치면 엄청난 힘을 지니는 존재로 돌변한다. 처음부터 우리는 그 눈의 가벼움과 그 깨끗함과 그 순수함에 깜빡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눈은 처음 순수하지만 그것이 녹을 때의 그 질척질척하고 더러운 모습은 눈에 대한 환상을 짓이겨 버리기도 한다.

 눈을 여성적으로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온 세상을 흰 색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는 그 무소부재의 권력은 어떠한 독재자라도 감히 따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폭설은 고속도로마저도 무용지물로 만들고, 비행기도 뜨지 못하게 만든다. 산사태를 몰고 오기도 하고 천장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더 이상 나긋나긋한 여성성으로만 대할 수 없음을 전신으로 체감하게 된다.

 눈 덮인 탄천 산책로를 걸었다. 산책로는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상태여서 매우 조심스러웠다. 나이 든 사람들의 무시할 수 없는 적, 낙상이라도 하게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산책로와 나란히 나 있는 자전거길은 그런대로 눈이 녹아서 걸을 만했다.

 자전거길은 왜 산책로보다 눈이 많이 녹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산책로의 투수콘은 녹색 계통임에 비해 자전거길의 그것은 붉은색 계통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색의 조화였다.

 산책로에도 군데군데 눈이 녹은 곳들이 보였다. 그런 곳은 대부분 오수관의  철제 뚜껑이 있는 곳이었다. 배수로 위의 철제망이 덮여 있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투수콘보다도, 시멘트보다도 쇠붙이가 있는 곳의 눈이 먼저 녹은 것이다.

 우리는 보통 겨울철의 쇠붙이를 섬뜩할 정도의 차가움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물건으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쇠붙이는 오히려 따뜻했던 것이다. 이육사의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는 그러니까 꽁꽁 얼어붙은 겨울도, 겉으로는 강인함이 느껴지는 강철 같은 존재이나, 그 속에는 이미 쉽게 녹여질 수 있는 성질을 내포하고 있는 것, 그래서 희망과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무지개로 환치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역설적으로 노래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쉽게 변하지 않는 마음을 ‘철석같이 굳은 마음’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쇳덩이는 무쇠건 강철이건 고온에서는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때로는 액체로까지 변해 버리지 않던가? 그러니까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리키려면 ‘쇳덩이 같은…’이라는 표현보다는 ‘일편단심 어쩌구…’가 더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단심(丹心)’을 흔히들 ‘붉은 마음’이라고 해 버리는데, 붉은 마음이 왜 변하지 않음을 의미하는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붉은 색 계통의 밝은 빛은 냉랭함으로 일관되기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빛깔이 되어 남까지도 쉽게 변하게 만드는 빛깔이었는데….

 ‘단(丹)’이 ‘붉을 단’자라서 ‘丹心’을 ‘붉은 마음’으로 직역을 해 버리지만, 그건 어거지 해석일 뿐이다. ‘丹心’은 바로 ‘丹의 마음’이라야 하는 것이다. ‘丹’은 무엇인가? ‘丹’은 곧 ‘丹砂’(혹은 朱砂, 硃砂, 辰砂)를 가리키는 말이다. ‘丹砂’는 수은과 유황의 화합물로서 어린애들의 경기(驚氣)에 사용하는 약품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인주(印朱)의 원료로 쓰이는 물건이다. 인주는 변색이 되면 안 되지 않는가? ‘丹’은 바로 그 ‘변하지 않는 물질’인 것이다.

 ‘단가마이불가탈기적(丹可磨而不可奪其赤; 丹은 갈아 버릴 수는 있어도 그 붉은 색을 빼앗을 수는 없다)’이라고 했다. ‘丹’은 아무리 갈고 갈아도 그 붉은 색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丹心’은 ‘변하지 않는 마음’, ‘충성심’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철석같이 믿었는데…’ 하는 말도 사용한다. 그 말은 ‘변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는데 (변하고 말았구나)…’ 하는 탄식이 아니던가? 쇠나 돌이나 다 엄청난 고온에서는 녹아 버린다. ‘목석 같은 마음’에서의 ‘나무’도 있지만, 여기서 ‘나무’는 ‘쇠’보다도 먼저 불타 버리는 물건, 겉으로는 냉랭한 것 같아도 열 번만 찍으면 넘어가고 마는 물건이 바로 나무인 것이다.

 그래도 가장 더디게 녹는 것은 ‘돌’이 아닐까 싶다. 돌 중에서도 웬만한 고온에서는 끄떡없는 놈이 있으니, 그건 바로 금강석(金剛石)이다. 금강석? 금강석! Diamond! 그렇다, 다이아몬드는 쉽게 녹지 않는다. 화재 현장에서 모든 것이 다 타 버려도 멀쩡하게 남아 있는 것이 다이아몬드다. 그것이 다이아몬드의 고귀함을 증명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물론 다이아몬드의 고귀함은 그 빛깔이 우선일 것이다. 심해에서는 스스로 발광(發光)하는 생물들도 상당수 있는 모양이지만, 우리가 흔히 대할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 중 제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는, 생물로서는 ‘반딧불’, 무생물에서 다이아몬드뿐은 아닐까? 다이아몬드는 스스로 빛을 내는 돌이기에 돌 중의 돌이 된 것이다.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으신 분들, 불빛 없는 깜깜한 곳에서 당신의 다이아몬드를 꺼내어 보시라.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는지?

 그래, 그렇다. 차가워 보이는 쇳덩이가 먼저 눈을 녹이게 하듯,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는 사람들이 실은 내면에 따뜻함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다가서는 데에는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다가서야 할 것이다. 무쇠를 녹일 수 있는 정도의 열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오히려 나 같은 사람들, 한 마디로 미지근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쉽게 친해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이런 사람들도 나름대로 뜨거워질 수 있는 전원 공급의 스위치는 따로 있지만 말이다.

 차가움이란 편견이다. 누구나 때로는 차가워 보일 수가 있고, 또 차가워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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