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천 산책로 걷기
이 웅 재
40여 년 동안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힘들지 않게 끊었다. 끊겠다는 생각을 가지니까 그냥 끊어졌다. 사실 이제까지는 주위에서 끊으라는 압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끊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다 보니까 끊어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담배를 끊었더니 체중이 불어났다. 통상 2~3kg은 불어난다고들 하지만, 나는 좀 달랐다. 7kg이나 불어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늘어난 몸무게를 지탱하기 힘들어 관절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담배를 피울 수도 없는 일, 옛날 고등학교 근무 시절의 제자인 내과의원을 찾았다.
“선생님, 잘 하셨어요. 어차피 나이가 들면 퇴행성관절염은 오게 마련인데, 그게 조금 빨리 온 것뿐이죠. 대신 걷기를 많이 하세요. 그게 최곱니다.”
믿어야지. 내게서 배워 의사가 되었는데, 그 의사의 말을 내가 안 믿어준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얘기가 아닌가!
좌우간, 그래서 나의 탄천로 산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건 건강 문제와는 달리, 정말로 아주 소중한 일과로 자리 잡았다. 1시간 정도의 걷기, 그건 산책과는 조금 달랐는데, 사실 나는 산책을 즐기고 싶었지만, 건강을 위한 걷기는 그게 아니란다. 그러니까 몸을 곧추 세우고 땀이 뻘뻘 흘려지도록 빨리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그 빨리 걷는 것은 마음에 별로 들지 않는다. 육체적 건강에는 좋을지 몰라도 그것은 명상이나 사고의 유연성을 동반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이 비집고 들어설 틈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나름대로의 걷기를 한다. 한마디로 느리게 걷는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산책하는 정도의 걸음은 아니다. 산책의 개념보다는 조금 빨리, 그러나 체중 감량을 위해 걷는 다른 사람의 걸음보다는 느리게, 나는 걷는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을 키운다.
아, 미처 얘기를 못 했다. 탄천을 걸을 때 나는 mp3를 휴대한다. 요새 그 시끌벅쩍한 음악엔 질색이다 보니 그저 내가 좋아하는 특정 방송만을 들을 뿐이지만, 그놈을 주머니에 넣고 이어폰을 끼고 적당한 걸음으로 걷다 보면 온갖 상념이 떠오른다. 그건, 정신 건강을 아주 훌륭히 지켜주고 있는 일이다.
봄이면 새로이 싹이 트고, 여름이면 무성하게 자라나고, 가을이면 아름답게 꽃을 피운 후에 서서히 시들어가다가, 겨울이면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는 모습을 나름대로 즐기면서, 나는 이곳 탄천 산책로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살기 시작했다. 싹터 오르고, 자라고, 꽃 피고, 시들어 가고, 떨어져 가고…, 그건 더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였다. 자연의 순리,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그렇게 자연의 순리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런 것 없이 늘 사랑하고, 늘 웃으면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한 삶을 여태껏 살아왔다. 원망하고 탓하면서 살아왔고, 불평불만에 가득찬 삶을 살아왔다. 가난을 원망했고, 행운이 찾아주지 않음을 탓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한 것은, 젊었을 때는 지나친 갈비라서 제발 살 좀 쪘으면 하기를 바랐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몸이 불어나고, 담배를 끊으면서 체중이 늘자 이젠 반대로 살찌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탓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은 그만두어야 하겠다. 그저 자연스럽게, 억지 선(善)을 의식하지 않은 채, 조용히 내 삶을 살아가야겠다. 그것이 이제는 내 소망이요, 그것이 앞으로는 나의 바람이다.
탄천을 걷는다. 탄천 산책로를 걷는다. 걸으면서 잉어들을 본다. 팔뚝만큼씩 큰 잉어들을 본다. 조금은 징그러울 정도다. 예전에는 탄천에서 잉어 구경하기가 무척 힘들었었다. 그런데 저렇게 떼를 지어 다닌다. 의도적으로 치어들을 풀어놓은 결과일 것이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때로는 죽어서 배를 허옇게 드러내놓은 놈도 있다. 탄천이 오염된 탓이다. 한쪽에서는 잉어를 풀어놓고 다른 한쪽에서는 냇물을 오염시키고….
탄천을 걷는다. 아무 때나 시간 날 때 걷는다. 걸으면서 물오리들을 본다. 어떤 놈들은 집오리 모양이고 어떤 놈은 자연산처럼 보인다. 어미로 보이는 한 놈이 여남은씩 새끼들을 데리고 다니는 물오리를 본다. 어미는 항상 새끼들을 보살피느라 사주경계를 철저히 한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성은 같은 모양이다.
탄천을 걷는다. 걸으면서 개망초를 본다. 안타깝다. 6․25 무렵에 들어왔다는 외래종, 놈들 때문에 망초까지 덩달아 푸대접받는 현상이 마음 아프다. 온 들판을 덮고 이젠 웬만한 산의 중턱까지도 접수해버린 놈들을 보면 내 가슴은 아리다. 우리 토종의 풀, 야생초들이 살아갈 터전을 빼앗아 가는 놈들이 미워서 한두 개 뽑아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별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내 가슴은 다시 쓰려진다.
탄천을 걷는다. 걸으면서 애기똥풀을 본다. 반갑다. 양귀비과에 속하는 애기똥풀. 잎이나 대에서 애기똥처럼 노오란 액체가 나오는 풀. 봉숭아물 들이듯 손톱에 노오란 물감을 들일 수 있는 풀. 그 노란 꽃을 보면, 애인이라도 만난 듯 가슴이 설레기까지 한다.
탄천을 걷는다. 이어폰에서는 때로는 조용하게, 때로는 우아하게, 그리고 때로는 시끄럽고도 세속적이게 음악이 흐른다. 음악이 흐른다. 탄천이 흐른다. 상념이 흐른다. 오늘이 흐른다. 그리고 내가, 내가 흐른다.
흐르는 것은 항상 새롭다. 흐르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모습을 지니지 않는다. 사계(四季)의 자연이 언제나 같지 않듯이, 흐르는 사고 안에서는 우주가 항상 새롭다.
흐르는 것은 썩지 않는다. 아니, 그렇지도 않다. 탄천은 흐르는데, 썩은 냄새가 난다. 누가 탄천을 썩게 했을까? 음식점 주인이? 세탁소에서? 세차장, 자동차 정비소? 아니다. 탄천을 썩게 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걸 왜들 모르는 체하는가? 이제까지 탄천을 썩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체했듯이, 이제부터는 우리 모두 누가 하는지도 모르게 탄천을 맑게 하자. 탄천을 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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