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지엔느

빛 바랜 추억 하나

거북이3 2006. 5. 4. 11:58
 

빛 바랜 추억 하나

                                                이  웅  재

 초등학교 동창회보 창간호를 앞에 두고 학교의 연혁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이기두, 어쩐지 그 이름 앞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어찌 보면 낯이 익은 듯도 싶었으나 한편 생경스러운 느낌이기도 했다. 이기두, 李起斗…, 기두, 기두, 기두기두기…두기두기, 뚜기뚜기…, 그래, 메뚜기였어. 드디어 기억의 한 조각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제3대 교장 이기두. 그렇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50여 년 전의 교장 선생님, 그분의 별명이 메뚜기였다. 전체적으로 조금 마른 체구에다가 길쭉길쭉한 골격, 무엇보다도 반 이상이 벗겨진 독두(禿頭). 그 외모에서 붙은 별명이 메뚜기였었는데, 그 이름에서도 메뚜기와의 친연성(親緣性)을 찾아볼 수 있어 금상첨화, 해서 메뚜기란 별명은 불변의 진리처럼 굳어져 버렸던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동기들 이름도 때때로 아리송해지는 터에 담임 선생님도 아닌 교장 선생님 이름이 새삼 추억의 중심부로 부상(浮上)하였으니, 언뜻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뚜기뚜기 메뚜기’를 땡중 염불 외듯 되뇌어 보았다. 드디어 몇 개의 그림 이 그려진다.


 첫 번째 그림. 추운 겨울날, 전체 애국조회 장면이다. 오돌오돌 떨며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학생들, 그러나 훈화는 끝날 줄을 모른다.

 “창수야, 겨울에는 메뚜기가 설치는 계절이 아니잖아?” “돌연변이잖아.”

 대열의 뒤쪽에서 수군대는 소리, 그 소리는 너무나 은밀하여 입에서 나오자마자 곧 돌돌 얼어버리고 말았다.

 “에 또, 그럼 마지막으로….” 아, 이제야 끝나려나 보구나. 그러나 웬걸? 속단은 금물이다.

 “한 가지 덧붙일 말은….” 창수가 받았다.

 “요새 메뚜기는 겨울에도 쌩쌩하답니다!”


 두 번째 그림. 역시 추운 날이긴 하였지만, 운동장이 아닌 교실 두 개를 터 놓은 임시 강당이었다. 분위기가 매우 엄숙했다. 졸업식 날,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예전 공자님(노자였었던가?)께서 마지막으로 떠나실 때, 그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교훈이 될 수 있는 말씀 한 마디만….”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는 그 언제 듣던 때보다도 차분했습니다.

 “공자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입을 크게 벌리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내 혀가 있느냐?’ 혀가 없을 리는 없었지요. ‘예, 있습니다.’

 제자들이 말하자 공자 님은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고 떠나가셨습니다. 여러분, 공자 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학생들 모두가 매우 궁금하다는 듯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겨울 메뚜기…어쩌고 하는 소곤거림도 없었습니다.

 “이로 혀를 깨물면 혀는 잘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 님의 이는 다 없어졌는데도 혀는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강한 것보다 부드러운 것이 훨씬 오래 간다는 것, 여러분도 앞으로 이 점은 꼭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날의 훈화는 그렇게 짧았습니다. ‘에 또…’도 없었고, ‘그럼 마지막으로…’도 없었고, ‘한 가지 덧붙일 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기두 교장 선생님’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던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이기두 교장 선생님 때문에 우리들은 힘든 세상, 짜증나는 일을 맞으면서도 늘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지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메뚜기 교장 선생님, 별명을 불러서 죄송스럽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선 한겨울에도 설칠 수 있는 분이실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저희들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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