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양가 한 구절을 흥얼흥얼…
이 웅 재
순천의 낙안읍성(樂安邑城)은 이름 그대로 안락(安樂)하게 보였다. 200여 채의 초가가 자연스레 느껴지는 돌담에 둘러싸인 채 한껏 정겨운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오래 전에 떠난 고향집이런 듯 비스듬하게 닫혀 있는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 대청마루에 네 활개를 활짝 펴고 벌렁 드러눕고 싶다.
“어머니, 제가 왔습니다!”
부엌 쪽에다 대고 소리라도 지를라치면, 물에 젖은 손을 행주치마에다 쓱쓱 문지르시며 주름살투성이의 어머니가 모처럼 화알짝 웃는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만 같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용인 민속촌, 전시용의 제주 성읍민속마을과는 다른 자연부락 그대로의 형태인데다가 안동의 하회마을과 같은 양반마을도 아닌, 서민들이 살아왔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기에 더욱 살갑게 느껴진다. 조상들의 체취가 물씬 풍겨지기 때문이다.
고려 말기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조선 태조 때 이 고장 출신 절제사(節制使) 김빈길(金贇吉) 장군이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했다고 한다.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은 도(都), 거기에 쌓은 성은 도성이다. 그리고 전란에 대비하여 산을 둘러싼 성이 산성이다. 이에 비해 읍성은 시가지에 위치해서 낮은 산이나 평지에 쌓은 것인데, 이곳은 낮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였다. 세종 때 본래보다 넓혀서 석성으로 개축했고, 인조 때에는 다시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이를 중수했단다.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셔놓은 넓은 객사는 이 읍성이 상당히 부유한 마을이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매월 삭망에 군수 이하 전 관속이 망궐배례(望闕拜禮)를 하였단다.
성내의 가옥은 원형보존을 위하여 초가집이 대부분이었지만, 툇마루와 부엌, 토방 모두가 낙낙한 품새였고, 작은 방 앞 처마 밑 토담을 둘러쳐서 만든 부엌은 중부지방 특유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었고, 둥그스름한 이엉도 두껍게 이어져 있어 푸근한 느낌이었다. 장독대에 즐비하게 늘어선 크고 작은 장독들은 보기만 하여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이웃과 이웃을 구분해주는 돌담도 그다지 높지 않아 서로가 담 너머로 인사라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였고, 그 생김새도 모나지 않아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그처럼 부드러울 것으로 여겨졌다. 이처럼 평화스러운 마을에 읍성을 쌓아야만 하도록 만든 왜구가 새삼스레 미워지고 있었다.
동서 방향으로 직사각형의 성곽은 1~2m 크기의 정방형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이 4m로 쌓고 돌과 돌 사이에는 작은 돌로 쐐기 박음을 하였는데, 얼핏 어설픈 듯 보이지만 지금까지도 아주 견고한 상태였다. 그 성 안 4만 1천 평에 동내, 남내, 서내의 3개 마을이 들어있고, 현재 성 안팎으로 총 91세대 261명이 살고 있단다.
400여 년 역사의 이 읍성에는 300~600년 수령으로 추정되는 노거수(老巨樹) 32그루가 있어 더욱 창연(蒼然)한 고색(古色)을 뽐내고 있는 듯싶었다. 특히 성곽의 축(軸)과 같은 돛대 역할을 한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의 황홀하기 그지없는 노란 단풍잎은 마지막 가고 있는 11월 늦가을의 정취를 한껏 드러내주고 있었다. 나무 주위에 떨어져 있는 단풍잎은 속인의 발로 밟기에는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객사 뒤편의 팽나무도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나무라 하며, 사무당(使無堂)이라 씌어 있는 동헌 앞 정원 한 쪽 귀퉁이에는 수줍은 듯하면서도 애써 자신을 보아달라는 듯이 피어 있는 자잘한 꽃송이의 산다화(散茶花)가 계절감각을 혼란스럽게 해주고 있었다.
동헌 앞마당 정면에는 죄인으로 보이는 사내의 꿇어앉은 상(像)을 하나 만들어 놓았는데, 그의 왼쪽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어 이곳의 평화로운 느낌과는 상치되는 모습이라서 별로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관광객들 중에는 그 사내 옆에 같은 자세로 꿇어앉아 보는가 하면, 그 오른쪽에 설치되어 있는 형틀에 곤장을 맞으려고 엎드려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싶고, 그처럼 곤장을 맞아보고 싶은 것일까? 정 그렇다면 구멍가게에라도 가서 몇 가지 시시껍적한 물건을 훔치고 치도곤(治盜棍)이라도 맞아보는 건 어떨는지?
나는 성곽 위를 걸어보기로 했다. 성곽의 총 길이는 1,410m, 3~4m의 너비를 지니고 있어 두세 명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도 걸을 만했다. 성곽 바깥쪽으로는 말 몇 마리가 암수놀이를 하고 있었다. 보기에도 면구스러운 한 놈의 그 장대한 물건 때문에 짐짓 외면을 하고 무심한 체 걷고 있노라니, 성곽 안쪽으로 무성한 대나무가 우거져 있는 것과 놀부 심술보를 닮아 뒤틀린 모과나무가 드문드문 모과를 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성곽 바깥쪽으로는 유자나무가 노오란 유자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고, 또 그 옆으로는 커다란 작두콩의 콩꼬투리가 눈길을 끌고 있었다.
다른 낙엽수들은 잎을 모두 떨군 채 겨울맞이를 하기 위해 쓸쓸히 서 있었으며, 파아란 생강 잎들이며 시든 연꽃이 쓸쓸하게 보이는 연못도 몇 개 보였다.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 곳에 있는 낙풍루(樂豊樓)의 옹성 앞으로는 예전 축성 당시에는 없었다는 해자(垓字)도 있었고, 나오는 길 양 옆에는 석구(石狗) 2기가 눈길을 끌었다. 원래는 3기가 있었다는 이 석구는 잡신의 침범을 막아준다는 영물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고 일본에 많은 것이라니, 아마도 왜구를 물리치려는 읍성이다 보니 그들이 믿고 있는 풍습을 따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평지에 쌓은 성, 사적 302호의 낙안읍성은 읍성 중 그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한 곳이란다. 평소에 대하기 힘든 읍성의 요모조모를 감상하느라 다리품도 적잖이 팔았건만, 그 푸근하고 넉넉한 마을의 모습에 동화가 되어서인지 마음만은 한껏 풍요로워져 “일출이작(日出而作)하고 일입이식(日入而息)하며…” 하는 격양가 한 구절이 저절로 흥얼흥얼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