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의 비밀
이 웅 재
바람도 없는데 구름은 다리가 아프다고 주저 물러앉는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해발 100여 m쯤 되는 곳에 운주사(雲住寺)가 무심히 자리잡고 있다. 초입의 산문에는 ‘영귀산운주사(靈龜山雲住寺)’란 현판이 탐승객들을 맞아준다.
그 오른쪽으로는 그리 크지 않은 석벽을 배경으로 불상 6구(軀)가 그 크기, 위치, 생김새 등에 아무런 원칙도 찾아볼 수 없이 무작위로 배열되어 있다. 아니, 그걸 불상이라 할 수 있을까? 끌과 망치를 가지고 몇 군데 쪼기만 하면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무기교의 불상, 그건 분명 내로라 하는 석공들의 작품이라기엔 너무나 미적인 감각이 없는, 제멋대로 빚어진 모습들이었다. 운주사는 그렇게 처음부터 상식을 배반한다.
그런 불상들을 바라보는 순간, 문득 한때 인기 절정이었던 코메디언 이주일이 생각났다. 뒤뚱뒤뚱 오리걸음으로 “못 생겨서 미안합니다.”라고 했던 이주일은 이곳의 불상들에 비하면 미남 중의 미남이었다. 들판 쪽으로 남아있는 부처들도 한결같이 버려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못 생기고 그토록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불상들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불상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들판에 버려진 듯한 불상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암반의 단애면 하단을 털어내고 대좌를 만들었거나 단애면의 일부를 다듬어서 기대어 놓은 불상들이었다. 몸의 비례도 맞지 않고 눈이나 코 등이 생략되어 있거나 아, 무엇보다도 불상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그것, 백호(白毫)가 없지 않은가? 그건 자연에다가 약간의 인공을 덧붙여 만든 석우(石偶)들일 뿐이었다.
근처에 있는 원형의 다층석탑도 다른 곳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탑이었다. 그뿐인가? 석조불감(石造佛龕)의 쌍배불(雙背佛)도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 그리고 그것은 두 부처가 한 불감 안에서 등을 맞대고 앉음으로써 그 원력(願力)이 서로 상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져서 그 이질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계곡 전체의 모습은 배의 형국, 그래서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한단다. 운주사와 관련된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뿐이다. 천불천탑을 완성하면 이곳이 수도가 될 수 있을 것인데, 일에 지친 꾀 많은 사동(使童)이 그만 꼬꼬 하고 닭 울음소리를 내는 바람에 도선국사(道詵國師)에게 불려왔던 천상의 석공들이 일손을 멈추고 하늘로 올라가 버려서 탑과 부처가 각각 하나씩 모자랐다고 하는 얘기가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이 아닐까 생각되지만, 거기에는 허점이 너무 많다. 개별적인 불상이나 불탑으로서의 전설로는 그럴 듯한 면이 없지 않으나 운주사 전체를 휘갑하여 생각할 때엔 서로 모순이 된다거나 맥락이 연결되지 않는 전설들인 때문이다.
운주사로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천불래회운중주(千佛來會雲中住; 천 기의 부처가 와서 모여 구름 가운데 머물었고)’,왼쪽에는 ‘천탑용출편만산(千塔湧出偏滿山; 천 개의 탑이 불쑥 솟아나 온 산 가득 펼쳐져 있도다.)’라 씌어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것은 ‘천불천탑’의 법력(法力)을 믿는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위사(僞史)일 뿐이다.
천불천탑이 완성되면, 이곳이 백제의 수도가 된다고? 그건 완전한 사기극(詐欺劇)이었을 뿐이다. 그것이 진정이었다면 이곳의 부처들이 저처럼 마구 쪼아놓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온 공력을 다해서 만들어 놓은 모습이었어야 할 텐데,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다.
운주사 경내에서 오른쪽으로 있는 몇몇 석탑을 보러 갔던 나는, 거기서 허름한 행색의 신사 한 분을 만났다. 그는 탐승객들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려고 애를 쓰는 듯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의 말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듣질 않았다. 약간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나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 탑에 대해서 설명 좀 해 주시겠어요?”
그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 미소는 여지껏 대해보지 못했던 미소였다. 그 미소는 관음보살의 미소였고, 석가불의 미소, 어쩌면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였다.
그는 말했다.
“이 사층석탑의 뒤에 있는 명당탑(明堂塔), 이 탑이 이곳의 가장 중요한 인공물입니다. 이곳을 천불사(千佛寺)라고 하는 것은 후세인들의 명명일 뿐입니다. 왜 이곳에 들어오실 때 보시지 않았습니까? ‘영귀산운주사(靈龜山雲住寺)’라는 현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곳은 영귀산입니다. 이곳은 완전한 거북의 형상이지요.
그 거북의 머리가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이곳, 명당탑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탑을 세운 것은 그러한 명당의 지기(地氣)를 눌러 막으려는 것이었지요.”
그렇다. 만 년 동안 산다는 신령스러운 거북이 바로 영귀, 그리고 거북의 머리라면 귀두(龜頭), 그 귀두가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는 것은 생산성을 위한 행위가 아니던가?
“이 산은 돌산이지만 이곳만은 한 길을 파도 황토입니다. 이 자리는 바로 임금이 태어날 자리였던 것입니다.”
명당탑의 탑신이 다른 탑과는 달리 둥근 모양인 것도 성기(性器)의 형상을 본딴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런 모든 점을 생각해 보니 따져볼수록 그의 말이 옳았다.
명당이라는 곳에 왜 탑을 세우는가? 무거운 돌탑을 세워놓는다는 것은 그 명당의 지기를 눌러 명당이지 못하게 만들자는 의도밖에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이 산의 사방 높은 지대, 눈에 잘 띄는 곳마다 탑을 세워놓은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탑을 산 위에 세운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많은 사람들이 이 명당탑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않았다. 심지어는 운주사 안내서에서도 관광도에 그 이름만 언급되어 있을 뿐, 다른 불탑들처럼 사진 한 장 실려있지 않았다.
신라 말, 나라는 어수선했다. 유달리 임금의 교체가 잦았던 것은 바로 정정(政情)의 불안정을 의미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영귀산에 성군(聖君)이 태어나서 천하를 평정하리라는 도참설이 퍼지면서 신라의 왕궁은 그 대책 마련에 나서게 된다. 도참설을 한껏 부풀려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우면 천하의 도읍이 될 것이라고 부추겨 주민들로 하여금 불상과 불탑을 만들도록 한다. 그들은 석공이 아니다. 당연히 그 불상 불탑들은 정형을 지닐 수가 없었을밖에….
그런데 다시 한번 살펴보니 불상과 불탑이 다르다. 제멋대로인 것은 주로 불상이었다. 불탑들은 그렇지가 않다. 가끔 원형불탑이 있어 특이한 느낌까지 주고 있지만, 그리고 명당탑도 탑신은 원형으로 되어 있었지만, 불탑은 마구잡이가 아니었다. 불탑은 대부분 전문가의 솜씨임에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은 이곳의 지기를 눌러버리자는 의도를 가진 자들의 계획적인 공사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짐작하게 해 준다. 명당을 비롯하여 산등성이에서 지기를 찍어누르고 있는 것은 모두가 불탑이었다. 여기저기 버려져 있는 듯한 불상들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산등성이의 불상이라면, 그 유명한 와불(臥佛) 정도이겠는데, 그 와불은 기실 부처가 아니었다. 그건 처사(處士)의 모습이지 부처의 상호는 아닌 것이다. 더구나 그 와불의 왼쪽 머리맡의 바위…, 그것은 그 처사의 모자로 만들어 놓은 것이란다. 모자를 쓰고 있는 불상이 있었던가? 과문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불상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더구나 그 와불은 옆에 마누라까지도 대동하고 있다. 어느 곳의 불상이 그렇게 아내까지 데리고 있었던가?
외면상으로는 와불은 좌상, 그 옆의 아낙은 입상의 형태이다. 그 와불의 아래쪽에는 와불을 바위에서 떼어내려 했던 흔적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 그 불상들을 떼어내 앉고 서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까? 그러니까 그것은 애초부터 세울 수 없음을 전제로 한 것, 와불이 일어서면 천지개벽을 하고 이곳이 수도가 될 것이라는 얘기는 이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였던 것이 아닐까? 아내와 함께 누워있는 처사, 그가 불쑥 일어설 생각을 가질 것이라는 느낌은 와불 자체가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운주사, 이곳의 그 수많은 불상들에게서는 그 흔한 미소 또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웃음을 잃은 불상들, 그것이 운주사를 서글픈 마음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운주사, 지나가던 구름마저도 잠시 머물러 그 서글픔을 함께하고 가는 곳, 구름은 분명 웃음을 드러내줄 수 있는 상관물은 아니지 않던가?
나는 운주사에서 백제의 설움, 역사의 무상함을 절감했다. 잊어버리자! 잊기 위해 밤이 늦었지만, 내 친구, 술님을 초청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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