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살아남기
이 웅 재
비 온 다음날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탄천을 산책하고 있었다. 빗물로 인해 더러운 먼지가 말끔히 가셔진 산책로는 싱그러웠다. 늘어나서 넉넉하게 보이는 탄천의 수량(水量)도 시원스런 느낌을 더해주고 있었다. 초여름의 미풍도 선들선들 불었고 물가 둔치에 피어 있는 노오란색의 꽃창포도 산뜻했다.
늘 그렇듯이 집에서 2Km쯤 되는 이매교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이매교에서 방아교 쪽으로 한 15m쯤 되는 곳이었다. 그곳엔 용수관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탄천과 합수(合水)되는 곳으로서, 특허품이란 글씨가 찍혀 있는 알루미늄처럼 흰색의 강철로 된 안전 펜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탄천의 수로(水路)는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특히 철철 흘러가는 물소리가 청량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안전 펜스의 아래쪽으로는 약간 커다란 수양버드나무가 한 그루 우뚝 서 있어서 가끔 부엉이인지 올빼미인지 하는 놈도 깃들이기도 해서 지나가던 산보꾼들이 발걸음을 멈추게도 하는 곳이었다.
팔뚝만한 잉어 몇 마리가 그 계단식 수로를 거슬러 상류 쪽으로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멘트로 된 그 수로를 역류하기는 쉽지가 않은 듯, 바라보고 있는 내가 안타까울 정도로 매번 실패하고 있었다. 하지만 잉어는 끈질겼다. 뛰어오르다 밀려나고 밀려났다간 다시 뛰어오르고….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도록 조바심을 유발시키는 것이었다. 바라보는 사람이 오히려 애가 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서…,내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한 번, 두 번…아홉 번, 열 번…아, 드디어 성공, 성공하고 있었다. 휴우, 나는 이마의 땀을 씻어 내렸다.
그 아래 하천 쪽으로는 둔치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바로 못 미쳐 흐르는 물 가장자리 쪽으로는 한 무더기의 줄풀이 자라고 있는 곳이 있었다. 어려서는 그놈의 줄기 속 하얀 속살을 발겨내어 우적우적 씹어 먹기도 하였었는데, 놈은 약간은 달착지근한 맛이 있었던가, 이제는 너무 오래 되어 기억마저 가물가물하다. 고혈압, 변비, 관절염 등에 좋다는 그걸 툭 하면 먹곤 했으니 어려서부터 무공해 천연 약품의 도움을 제대로 받은 셈이라고나 할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즘 고혈압으로 고생하고 당뇨도 치료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주의해야 되겠다는 의사의 진단이니 어렸을 때처럼 저 줄풀이라도 뽑아먹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보며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줄풀이 움직였다. 아니, 흔들렸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살랑살랑의 정도가 아니었다. 상당히 세차게 움직였다. 무슨 일일까? 처음에는 아마도 청둥오리가 줄풀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청둥오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줄풀은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웬 일일까? 나는 좀더 자세히 관찰하였다. 아하, 거기에는 잉어 두 마리가 몸부림치고 있었다. 줄풀의 떨기 속에서 발악을 하고 있었다. 어쩐 일로 잉어가 저 줄풀의 떨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을까? 계단식 수로를 역류하려다 기진해서 흐르는 물살에 밀려 내려오다가 걸린 것인가? 아니면 먹이를 찾아 헤매다가 잘못 걸려들게 된 것인가?
잉어는 두 마리였다. 하나는 큰 놈이고 다른 하나는 좀 작은 놈이었다. 아마도 부자지간, 아니면 모녀지간쯤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한 놈이 아니고 두 놈인 것으로 보아 수로를 역류하려다 밀려서 가게 된 것 같지는 않았다. 풀숲 쪽에는 여러 가지 먹이가 많을 것이었다. 큰 놈이 작은 놈에게 쉽게 먹이를 먹일 수 있도록 끌고 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경우라면 더더구나 얼마나 애가 탈 것인가?
줄풀의 풀숲을 벗어나려고 혼신의 노력으로 전진을 해 보지만, 저런, 줄풀의 일부가 쓰러져 있어서 진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한 놈씩 벗어나려 한다면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는데, 놈들은 꼭 두 놈이 한꺼번에 앞으로 전진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자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쓰러진 줄풀을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줄풀이 그리 쉽게 끊어지거나 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야, 이 멍충이 고기들아, 단체 행동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란 점도 알아 두어라. 개별적 행동을 취하란 말이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이 그들에게 전달될 리는 없었다.
놈들이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또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건 바로 뒤쪽으로 돌아나오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놈들은 우리 사람들처럼 그러한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안타까웠다.
놈들을 가서 끌어내 줄까? 하지만 물고기들이 사람의 손에 잡히는 순간, 엄청난 열을 받아 치명적인 화상을 입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럼 막대기 같은 것으로 밀어내 주면?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일단 물속으로, 진흙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이 물고기에게 해줄 수 있는 시혜에는 한계점이 있는 것은 아닐는지….
그렇다. 나는 드디어 핑계거리를 찾았다. 우리 인간들이 고난에 허덕일 때, 언제 신의 손길이 구원해 주었던가? 마찬가지로 물고기의 환난에 인간이 개입하여 해결해 줄 필요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자율성을 해치는 일이 아닐 것인가?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핑계거리는 모든 고난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우리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진리는 아니라는 믿음 말이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노력하라. 그러면 벗어나리라. 끊임없이 시도하라. 그러면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언젠가는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고난에 맞서 혼신의 투쟁을 아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제 일은 제가 해결해 내었을 때에라야만 남아있는 삶에의 지표가 될 수 있는 법이다. 나는 과감히 그 자리를 떴다.
이튿날, 그곳을 지나는 내게 어제의 그 잉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과연 내 행동이 옳았을까를 가볍게 한번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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